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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돈덕전
다시 피어나다

글, 사진.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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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 원경을 찍은 사진으로 왼쪽 돌담 너머로 미국대사관 깃발이 보인다. 양쪽으로 원뿔(고깔)형태의 건축물이 지어졌으나 사진상으로 오른쪽 부분은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현재 복원 중에 있는 돈덕전은 석조건물 원형의 모습을 참고할 만한 근거 자료가 부족해 철근과 시멘트를 이용해 최신식으로 지어지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누군가는 이곳을 보며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난날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떠올린다. 시청역 앞, 아픈 역사가 서린 정동길. 그렇게 ‘덕수궁’은 10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며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들을 풀어놓는다.

그 시절의 모습을 찾아서
일제에 의해 훼철되고 변형, 왜곡된 덕수궁이 100여 년 전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8년 6월 19일 덕수궁 광명문 기공식을 시작으로 돈덕전과 선원전의 원형 연구와 복원 작업에 나설 것을 발표했다. 계획대로라면 돈덕전은 2021년, 진전(眞殿)인 선원전(璿源殿),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54동), 배후림(상림원), 궁장(宮牆) 등은 2038년까지 복원이 완료된다.

덕수궁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13년간 대한제국의 궁궐로 사용된 곳이다. 당시에는 중명전과 옛 경기여고가 있던 자리까지 포함할 만큼 궁역이 넓었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면서 덕수궁의 궁역은 다양한 이유로 잘려나갔다.

궁궐의 전각들도 훼철됐다.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헐려 치워져 버린 것이다. 말해 무엇하랴. 일제에 의해 제 모습을 잃어간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그 찬란했던 과거와 치욕적이며 동시에 비극적이었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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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승하 후 빠르게 훼철되다
지금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만나 궁궐 밖으로 몸을 피함)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온 뒤임시거처로 사용되면서 정릉동 행궁(정릉행궁)으로 불리다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승격됐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됐다.

1897(광무 1)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덕수궁에는 중화전을 비롯해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이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 약 10년간의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가 됐던 장소였으며, 무엇보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들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과 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 건물도 들어섰다. 1910년에는 서양식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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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 순종 즉위식 기념사진.
돈덕전 측면 사진과 함께 순종사진을 넣었다.
 



중명전(重眀殿)은 경복궁의 집옥재와 같은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돼 1899년경에 완성된 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황제의 거처로 사용됐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서양식 1층 건물로 만들어졌으나 1901년 화재로 정면과 양측면의 3면에 화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 이후 1925년 다시 화재가 발생해 외벽만 남기고 소실되자 건물의 형태를 변형해 재건했다. 2009년 건물의 형태를 되찾는 공사를 실시해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후 지금은 전시관을 마련해 대한제국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은 1902(광무6)년 창건 당시에는 2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고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됐다. 중화전 남쪽의 중화문을 둘러싸고 사방에 행각을 둘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주변행각과 전각들이 헐리고 정원이 생기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됐다. 중화전뿐 아니라 덕수궁 내전 영역의 여러 전각들은 1919년 고종 승하 후 일제에 의해 빠르게 철거되고 훼손됐으며, 그 자리에는 연못과 산책로가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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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 정면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사진으로 건물 곳곳에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문양이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건물 2층 중앙에 고종과 순종이 보이며, 사진 왼쪽으로 어린 영친왕이 보인다. 한때 아관파천 때 사진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영친왕이 1897년 10월에 태어났기에 이는 불가능하다. 사진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거행된 고종의 양위식 장면으로 우측 하단에 대포의 모습이 보인다. 무력과 강압에 의한 양위식임을 보여준다.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경운궁으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圜丘壇)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고종.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히고자 했던 고종은 그 위상에 걸맞게 경운궁에 여러 전각들을 세우고 궁궐의 영역을 확장했다. 당시 궁궐은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의 3배 가까이 됐으며, 서구 문물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던 고종은 궁궐 안에 여러 서양 건축물을 세우는가 하면 전각 내 전등과 전화 등의 신문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최초의 궁궐 양관으로서 한양(韓洋)절충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설계를 러시아인에게 맡긴 이유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제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 빠른 속도로 덕수궁을 해체・축소하며 우리 민족의 역사성과 민족성을 지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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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 정면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사진으로 건물 곳곳에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건물 2층 중앙에 고종과 순종이 보이며, 사진 왼쪽으로 어
린 영친왕이 보인다. 한때 아관파천 때 사진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영친왕이 1897년 10
월에 태어났기에 이는 불가능하다. 사진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거행된 고종의 양위식 장면
으로 우측 하단에 대포의 모습이 보인다. 무력과 강압에 의한 양위식임을 보여준다.
 



중명전(重眀殿)은 경복궁의 집옥재와 같은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돼 1899년경에 완성된 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황제의 거처로 사용됐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서양식 1층 건물로 만들어졌으나 1901년 화재로 정면과 양측면의 3면에 화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 이후 1925년 다시 화재가 발생해 외벽만 남기고 소실되자 건물의 형태를 변형해 재건했다. 2009년 건물의 형태를 되찾는 공사를 실시해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후 지금은 전시관을 마련해 대한제국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거나 쓸쓸할 때 “을사년스럽다”고 말했다고한다. 그날의 원통함을 잊지 않기 위해 날씨를 형용하는 말로 새겨두었던 이 말은 “을씨년스럽다”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날의 비분강개(悲憤慷慨)함이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열강에 호소하기 위해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을 특사를 파견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고종의 비밀특명을 받고 갔던 이 세사람 중 그 누구도 다시는 황제 앞에 서지 못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한 후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후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약이 체결됐으니 이것이 바로 <한일병합조약>이다. 이 조약의 발표는 8월 29일 정오에 있었으며,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라 하여 ‘경술국치’로 불린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피었던 오얏꽃은 13년이 지난 1910년 8월의 어느날, 일제의 무력 앞에 허무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피고 지고 다시 피다
덕수궁 돈덕전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을 하기 위해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지어졌으며, 이후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 장소나 외국사신 접견 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됐다. 1907년에는 순종이 즉위하는 곳으로 사용됐으나,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는 덕수궁 공원화 사업 때문에 훼철됐고 이후에는 아동 유원지로 활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 복원 공사가 한창인 돈덕전이 1902년 이곳에 자리를 잡기 전 근처에 먼저 들어선 건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1883년 5월 자리 잡은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이다. 1884년 4월에는 영국공사관이 들어섰으며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후 1885년 10월에 정동에 개설한 구(舊) 러시아공사관(당시 영사관)의 정식 건물을 짓기 위해 1890년 8월 그 자리에 초석을 놓았다. 바로 이 러시아공사관이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해 있던 곳 즉 아관파천의 장소다. 1885년 12월 조선의 총해관(總海關)이 미국공사관과 영국공관 사이로 이전해 왔으며, 총해관장 관사가 있던 자리가 바로 돈덕전이 세워진 곳이다.

돈덕전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로 건물 외벽 곳곳에는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조성돼 있었다. 돈덕전 외관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건물 좌우에 원뿔(고깔) 형태로 올라간 건축 구조가 특이하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복원될 돈덕전은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300㎡의 규모로 내부는 대한제국 자료관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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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구(舊) 러시아공사관까지 갔던 길로 추정되는 곳이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공사관까지 120 남짓한 사잇길로 정면 언덕에 보이는 건물이 구 러시아공사관이다. 우) 복원된 고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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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6월 10일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발행된 <왕궁사(王宮史, 저자 이철원)> 안에도 실린 ‘덕수궁지도’라는 이름의 지도를 살펴보면
‘돈덕전’을 실선으로 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가 언제 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작 당시 이미 돈덕전을 훼철되고 사라진 뒤라
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사업으로 우리의 궁궐이 훼철된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이와같은 이유 외에도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과 영국공사관 사이의 도로 확장을 위해, 혹은 정구장을 만들기 위해 등 돈덕전 훼철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외력에 의해 궁궐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훼손되고 왜곡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록에 의하면 1920년 현재의 덕수궁과 미국대사관 사이에 담장 길이 조성되면서 덕수궁은 둘로 쪼개졌고, 조선왕조의 근원인 선원전 영역은 총독의 손에 넘어가 조선저축은행 등에 매각됐다. 선원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 10월 화재로 소실되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 옛 경기여고 터)로 옮겨 1901년 7월 복원됐다. 이도 잠시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 모두 훼철돼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가 해체되기도 했다.

돈덕전이 언제 훼철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20년대 들어 일제에 의해 훼철됐다는 주장과 1933년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철거했다는 주장이 있다. 1954년 6월 10일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발행된 <왕궁사(王宮史, 저자 이철원)> 안에도 실린 ‘덕수궁 지도’라는 이름의 지도를 살펴보면 ‘돈덕전’ 을 실선으로 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가 언제 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작 당시 이미 돈덕전을 훼철되고 사라진 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돈덕전 외에도 많은 부분의 훼철됐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2월 제작된 <덕수궁평면도(1:4800)>를 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돈덕전에만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도형으로 크게 표시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돈덕전은 덕수궁 내 중요한 건물이었으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이자 자주국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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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라는 이름의 지도를 살펴보면 ‘돈덕전’을 실선으로 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가 언제 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작 당시 이미 돈덕전을 훼철되고 사라진 뒤라는것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돈덕전 외에도 많은 부분의 훼철됐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2월 제작된 <덕수궁평면도(1:4800)>를 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돈덕전에만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도형으로 크게 표시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돈덕전은 덕수궁 내 중요한 건물이었으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이자 자주국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알기에 일제는 여러 이유를 들어 이 건물을 재빠르게 철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고종과 명성황후, 조선왕실에 대한 평가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혹자는 건물이 헐리고 다시 복원되는 일에 왜 그리힘을 써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역사에 있어 공과(功過)는 있기 마련이다. 일부러 나라와 백성을 파국으로 이끄는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 믿고 싶다. 혹 과(過)가 크다고 해도 외부세력에 의해 무력으로 나라의 국모가 시해당하고, 나라의 정사가 좌우지되는 것은분명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잘잘못을 배우고 성장한다. 덕수궁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야욕 앞에 조선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주국임을 상징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비운의 장소(중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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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왼쪽 뒤로 돈덕전이 복원 공사 중이다.
 


2021년 복원이 완료될 돈덕전. 당시의 설계도 등 참고할 자료가 많지 않아 복원이 아닌 ‘재건’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기록이 없다는 것 또한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한 일제의 야비한 술책 중 하나였지 않겠는가.

비록 당시의 완벽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다시금 태어나는 돈덕전을 통해 100여 년 전 을사늑약 당시 무참히 짓밟혔던 오얏꽃이 다시 한 번 활짝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역사를 바로잡아 가는 그 길, 길을 잃고 헤매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환지본처(還至本處), 만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그 길이 또한 진정한 광복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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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중인 돈덕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