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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덕수궁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석조전’


글, 사진.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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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좌측 뒤로 돈덕전이 보이며, 마차 두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인력거가 들어갈 수 있는 S자 길은 대한문에서 이어지며, 돈덕전 앞까지 도로가 나 있다. 비포장도로이지만 잘 다져져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德壽宮). 어쩌면 유행가 가사로 더 익숙할 수 있는 ‘덕수궁’은 1897(광무 1)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13년간 대한제국의 궁궐로 사용된 곳이다.

지금 복원 공사가 한창인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을 하기 위해 서양식 연회장으로 지어진 곳이다. 이후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 장소나 외국사신 접견 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됐다.

중명전(重眀殿)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아픔이 서린 곳이다. 처음에는 서양식 1층 건물로 만들어졌으나 1901년과 1925년에 발생한 화재로 건물의 형태를 변형해 재건했다가 2009년 건물의 형태를 되찾는 공사를 실시해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지금은 전시관을 마련해 대한제국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석조전,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
석조전(石造殿)은 덕수궁 안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로 당시 국내에 세워진 서양식 석조 건축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1900(광무 4)년에 착공해 10년 만인 1910(융희 4)년에 완공한 열주식(列柱式) 르네상스식 건물로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존 레지날드 하딩(John Reginald Harding, 1858~1921)이 내부 설계는 영국인 건축기사 로벨(Mr. Lovell)이 맡았다.

지층을 포함한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 , 측면 31 이며, 지층은 거실, 1층은 접견실 및 홀,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서재 등으로 사용됐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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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보이는 것이 석조전이며 우측에 보이는 흰 건물이 망대, 그 옆 건물이 중화전(측면)이다.
 


석조전은 1911~1922년 사이에는 영친왕 귀국 시 임시 숙소로, 1933~1938년에는 덕수궁미술관으로 사용됐으며, 1948~1950년에는 UN한국임시위원단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46년에는 이곳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1992~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 복원됐으며, 2014년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서관은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다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돼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1층 접견실은 황제를 폐현하는 방으로 서양식으로 꾸며졌으며, 석조전의 다른 방들과는 달리 황실의 문장인 이화문(李花文, 오얏꽃무늬)을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2층 중앙화랑은 복도를 따라 과거의 사진들을 걸어두었다. 작은 액자틀 속에 갇힌 한 세기 전 사진들이 마치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곳이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달라고, 진정한 광복을 위해 싸워달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찬란했던 과거와 암울했던 역사가 공존하는 공간. 바로 석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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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의 모습이 연못에 비쳐 운치를 더한다. 사각형의 연못 안에는 5톤 무게의 거북이가 석조전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다. 연못은 애초에
석조전 건물이 다 비치도록 설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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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전경과 돈덕전의 모습이 보인다. 돈덕전 옆으로 미대사관에 걸린 국기가 보인다. 아직 연못을 만들기 전으로 석조전 가운데에 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석조전은 황궁으로 지어졌다
석조전 완공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4월 7일자에 “덕수궁 안에 양제로 짓는 돌집이 근일에 필역(畢役)됐는데 그 역비는 구십삼만 이천 이백 구십 원이라”며 덕수궁 석조전 완공 소식을 전했다. 1900년 공사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정국을 수습한 고종은 1897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다. 경운궁은 이후 1907년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뀐다. 고종은 이곳 경운궁에 수많은 전각을 짓고 서양식 석조 궁전을 건립함으로써 제국의 위용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석조전은 바로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건물인 것이다. 대한제국의 화려한 비상을 꿈꾸었지만 사실 덕수궁은 역사의 아픔을 더 많이 간직한 곳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이자, 일본 통감부의 압력에 굴복해 순종에게 양위한 곳도 바로 이곳 덕수궁이다.

대한제국의 석조전은 공사를 시작하기 전인 1900년에 미국 건축 잡지 <The American Architect and Builiding news>에 목재로 제작된 십분의 일 크기의 모형이 소개되기도 했다. 1911년 3월 이후에는 석조전 앞 정원공사가 이루어졌다. 인접한 중화전(中和殿)의 회랑이 철거된 것도 이때의 일로 알려져 있다.

석조전 정원공사와 관련해서는 <매일신보>1911년 2월 28일자에 수록되기도 했다. “전이사실(前理事室), 평성문(平成門), 전위병소(前衛兵所)를 훼철(毁撤)하기로 작일(昨日) 정오(正午)에 입찰(入札)을 종(終)하였다”는 기사 내용으로 보아 정원을 만들기 위해 다른 건물을 철거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식 정원을 위해 외국에서 들여온 나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죽었다고 한다. 또한 지금 분수가 있던 자리에 사각형 연못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거북이 조각상을 배치했으나, 1938년 덕수궁 서관(현 덕수궁미술관)을 건립하면서 현재의 물개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로 바뀌게 된다.

석조전에 마련된 황제침실은 당초 고종의 침실로 계획됐으나, 고종이 석조전 옆 함녕전에서 생활함에 따라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마다 숙소로 사용됐으며, 침실 가구에 ‘EMPEROR'S BEDROOM(엠퍼러스 베드룸)’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이 특이할 만하다.

현대화된 화장실과 세면대, 욕실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황후침실도 1911년에 순헌황귀비의 죽음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1922년 영친왕비가 영친왕과 입국 시 잠시 사용됐다. 황제침실과 대칭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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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앞 계단 공사 등이 진행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연못이 조성될 곳에는 독수리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구경거리가 된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며 세워진 석조전은 결론적으로 고종이 아닌 황태자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간혹 외국 귀빈을 위한 숙소나 왕실의 연회와 접견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석조전은 대부분의 기간이 비어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의 위상은 계속 쇠락했고, 석조전의 위상과 용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1933년 10월 1일에는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덕수궁의 일반개방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석조전도 미술관으로 전환되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덕수궁 일대가 봄에는 꽃을 구경하는 곳으로, 가을이 되면 국화전시회장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소동물원까지 개설되면서 덕수궁 일대는 위락공간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1936년에 석조전 서편 공터에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의 신축이 결정되면서 1938년에는 이왕가미술관의 정식개관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원래의 석조전은 근대일본미술진열관(미술관구관), 새로 지은 ‘이왕가미술관’은 조선고대 미술진열관(미술관 신관)으로 불렸으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 화가들의 그림을 진열하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린 석조전.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갖은 풍파를 겪으며 지금은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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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2층 중앙화랑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 석조전 앞 연못에 거북이 조각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각형의 연못은 석조전 건물이 물
에 비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해당 사진 속 거북이의 무게는 5톤이었다. 무게를 5톤으로 정한 것은 대한제국이 황제국임을 알리는 이면적
인 뜻이 숨겨진 것은 아닐까.
 


연못에서 분수로, 거북이에서 물개로
지금은 석조전 앞에 네 마리의 물개 조각상이 있는 분수가 설치돼 있지만, 원래는 중앙에 거북이 조각상이 세워진 사각형의 연못이있던 곳이다. 연못 중앙에 자리한 거북이는 당시 5톤의 무게를 자랑할 정도의 크기였으며, 머리가 석조전을 향해 있었다. 연못은 또한 석조전이 물에 비치도록 조성돼 조형미와 아름다움을 더했다. 거북이 조각상의 무게가 5톤인 것도 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찾을 수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흔히 군주를 상징하는 동물로 용을 들 수 있는데, 이때 황제를 상징하는 용의 발톱은 5개(오조룡)이며 왕이나 황태자는 발톱이 4개이다. 우리나라는 왕의 상징이 봉황인 경우가 많지만 용 또한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쩌면 거북이의 무게를 5톤으로 맞춰 대한제국이 황제국이자 자주국임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거북이 조각상을 안치하기 전에는 독수리 조각상을 세워두기도 했다.

1920년대 사각형의 연못을 조성하면서 거북이 조각상을 세웠지만, 이후 1938년 서관을 증축하면서 물개 조각상이 설치된 분수대를 만든 것이다. 왜 하필이면 물개이고, 분수대인가.

물은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이치다. 옛 선조들은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궁궐 안에 하필이면 물이 아래에서 위로 솟는 분수대를 설치한다니, 그 배경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게다가 물개가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설치돼 있어 사방으로 물을 뿜어댄다.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는 거북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의미도 없는 물개가 궁궐 안에 들
어앉게 된 것이다. 현재 석조전 앞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는 물개 조각상은 일본 도쿄미술대학 교수 쓰다 시노부(津田信夫)가 1936년 제작한 ‘북해도약’이라는 청동 물개상을 1938년 재주조해 설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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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앞 분수대의 물개 조각상
 


이 조각상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대한제국이 영원하길 바라며 거북상을 설치한 것을 일제가 물개로 격하시켰다는 주장을 세우기도 하며, 또 한쪽에서는 이런 주장이 오류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거북이는 예로부터 우리민족과 함께하며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었으며, 연못에 설치된 거북이 조각상의 무게를 5톤으로 한정한 것에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이 거꾸로 흐르도록 설계된 분수와 우리 민족과
는 밀접한 관계가 없는 물개 조각상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배치한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굳이 연못을 메우면서 말이다.

덕수궁의 완벽한 복원은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보다 세밀한 관심과 조사가 필요하다. 석조전 앞 연못에 있던 그 거북이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역사의 답을 찾는 것은 이제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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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과 분수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