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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놀이마당,

춤추자 복 주셨네

초양(抄洋) 리기태 방패연 명장(한국연협회·리기태연보존회 회장)


글. 장수경 사진제공. 리기태 방패연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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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鳶)’은
저에게 삶이고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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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진심 어린 그의 한마디였다. 70년이 넘는 긴 세월. 시대는 변했어도 스승인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에게 전수받은 전통 연에 대한 마음은 늘 한결같았다. 하늘을 섬기던 우리 민족 그리고 진실한 마음을 담아 하늘에 날린 연. 대한민국 마지막 남은 유일한 조선시대 전통연인 방패연 원형기법 보유자 초양(抄洋) 리기태 명장(한국연협회·리기태연보존회 회장)은 그 깊은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푸르른 하늘에 연을 날렸다. 바람에 몸을 맡긴 연은 리 명장의 마음을 알듯, 더욱 고운 물결을 내며 살랑거렸다. 그의 연을 본 이들은 우리 전통미(美)에 반해갔고, 하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처럼 리 명장은 우리 옛것을 알리는 데 힘써왔다. 그 이야기를 2021년 ‘신축년(辛丑年)’ 흰 소띠의 해를 맞아 들
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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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리기태 방패연 명장 작품 <각시연>, 우)작품 <우롱>
 



액(厄) 보내고 복(福) 기원
연날리기는 종이에 가는 대나무 가지를 붙여 연을 만든 후, 얼레에 감은 실을 연결해 하늘로 날리는 민속놀이다. 세계 각국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고, 특히 동양 3국에서 성행하고 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초겨울에 시작해서 묵은 추위가 가시기 전까지 연을 날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월 초하루(설날)부터 대보름까지였다. 연에다가 ‘액(厄)’이나 ‘송액(送厄)’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 적고 집안의 복(福)과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그리고 겨우내 날리던 연은 줄을 끊어 날려 보내거나 달집에 넣어 태웠다. 대보름이 지났는데도 연을 날리는 사람은 ‘고리백정’이라 놀렸다. 연만 날리다가 한해 농사 준비가 늦어질까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리 명장은 “모든 놀이문화가 땅에서 이뤄지지만 연날리기만은 하늘에서 이뤄졌다”며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연을 날리면서 성스러운 복을 받았던 ‘천지인(天地人)’의 의미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역사에 기록된 우리 연
연날리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권(卷)41 열전(列傳) 제일 김유신(金庾信) 상조(上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진덕여왕(제28대 왕)이 즉위한 해에 대신(大臣) 비담과 염종이 왕을 폐하려 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왕의 군사는 월성에 주둔하는데 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진다. ‘패망의 징조’라는 흉흉한 소문에 진덕여왕은 불안해한다. 이때 김유신은 연에 허수아비(우인, 偶人)를 달아 하늘로 올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이 일로 전세가 역전되고 비담 군대는 토벌된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고려 말(1374) 최영 장군은 반란을 일으킨 몽골인을 진압하러 탐라(제주도)에 갔다. 하지만 섬 주위에는 탱자나무 가시덤불이 가득해 상륙할 수 없었다. 그때 지혜가 번뜩이는데, 봄철에 참억새 씨앗을 연을 이용해 섬 곳곳에 뿌린다. 그 해 가을, 섬은 마른 참억새로 뒤덮인다. 그러자 불화살을 쏘아 마른 참억새와 함께 가시덤불을 태우고 섬을 되찾는다. 또 다른 설도 있는데, 연에 광주리를 단 후 작은 사람을 태워 성벽 위에 올려서 밧줄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통신수단으로 연을 사용했다. 작전 지시 전달 암호로 연의색과 문양을 달리한 것이다. 또 조선 영조 임금은 백성들이 너무 조용하자 전염병에 걸리는 게 아닌가 걱정하며 연날리기를 지시했고, 직접 참관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 속에는 연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있다. 단순히 민속놀이로서가 아니라 통신, 군사적 용도로도 사용했다. 그만큼 연의 종류도 다양했는데, 우리나라에는 70여 종이 있다. 초창기에는 독수리·부엉이 등의 조류형상으로 만들었으나 차츰 삼각연, 사각연으로 형태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연은 ‘가오리연’과 ‘방패연’이다. 특히 ‘방패연’은 사각 장방형으로 가운데 구멍이 없는 게 특징이다. 반면 가운데 둥근 구멍이 있는 것은 ‘방구멍연’이라고 불린다. 연에 그려지는 그림도 다양했다. 반면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색의 ‘상주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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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태 방패연 명장 작품 <수리당가리연>
 


마지막 남은 조선 유일
방패연 원형기법 보유자

리 명장은 우리나라에 마지막 남은 조선 후기 방패연 원형기법 보유자다. 그는 6살 때 처음 연을 배웠다. 1대 스승이자 조부 이천석, 2대 스승이자 부친 가산 이용안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원형기법을 익혔다.

일제강점기에 조부와 부친은 목숨 걸고 연을 지켜냈다. 연을 날리다 일본 순사가 쫓아오면 가방에 넣어 재빠르게 도망갔고, 잠잠해지면 다시 연을 날렸다. 반드시 독립된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요,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한번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약산 김원봉 선생이 몰래 스승을 찾아와 대형 연 제작법을 배워간다. 대형 연으로 ‘삐라’를 뿌려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그의 스승은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위한 일을 기꺼이 도왔다.

지금도 리 명장은 스승에게 전수받은 조선시대 천연기법 방식 그대로 연을 만든다.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 선별부터, 색 만드는 것까지 모두 전통 방식이다. 사실 주변에는 값싼 물감 등 저렴한 재료는 많다. 하지만 리명장은 “그건 전통을 흉내 내는 것일 뿐 진짜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어느 순간 모방이 진짜인 것처럼 바뀔 수 있는 세상이기에 그는 더 깨어있어야만 했다. 또 정확하게 분별시켜줘야 했다. 그건 이 시대의 그의 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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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태 방패연 명장이 만든 <나룻배 창작 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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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하신년’이 적힌 리기태 방패연 명장의 <돌쪽바지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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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리기태 방패연 명장 작품인 <기바리눈쟁이연>, 우)리기태 방패연 명장 제자 이승진 작품 <천년만년연>
 



어느 날 영국 왕실에서 리 명장에게 ‘서울연’ 복원 자문 의뢰가 들어왔다. 영국왕립식물원에 소장된 것으로, 1888년 제2대 주한영국영사 토머스 와터스(1840~1901)가 조선인에게 선물 받은 것을 귀국할 때 가져간 것이었다. 이 연은 현존하는 한국민속연의 표준연이자, 127년간 보존되어 온 국내 최고 오래된 연이다. 일부 훼손된 이 연은 리 명장을 통해 제 모습을 되찾았다. 이는 리 명장에게도 매우 기쁜 일이었다. 사실 다른 지역에 비해 서울 지역은 특색 있는 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인 고(故)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서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했듯, 리 명장을 통해 복원된 ‘서울연’은 서울 연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다. 리 명장은 전통 원형기법으로 ‘서울연’을 재현해 북촌 마을에 있는 북촌전통공예 체험관인 그의 공방에놓았다. 현재 그는 영국왕립식물원에 소장된 ‘서울연’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반환운동’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고종의 명을 받고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연이 있었다. 당시 만국박람회 ‘대(大)조선관’을 통해 19세기 전통 방패연과 얼레가 출품된다. 이에 대해리 명장은 “원형 복원된 ‘서울연’은 1888년 제2대 주한 영국영사에 의해 영국으로 나갔는데, 이는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출품된 연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라며 서울연의 역사적 가치성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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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연을 만들고 있는 리기태 명장
 


한국 연 문화 국내외 곳곳 알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축제는 올림픽이다. 그 다음이 ‘연 축제’다. 그동안 리 명장은 국내외로 전통 연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2014년 한국, 카타르 수교 40주년 때리 명장이 손수 만든 방패연이 이슬람박물관에 영구 기증됐다. 또한 이슬람박물관 야외광장에서 연날리기 행사를 열어 카타르 4대 일간지는 물론 알자지라방송에서 대대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또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졸업한 것으로 잘 알려진 MBA전문경영대학원의 주임교수와 최고경영자(CEO) 등 17명이 리 명장의 강연을 듣기 위해 한국에 오기도 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는 방패연을 만들었다. 올해 2월 미국 워싱턴D.C.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행사에서는 ‘대형 태극기 파라포일 연’이 하늘 위로 떠 올랐다. 서울시민 연날리기대회도 12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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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립식물원에 소장된 조선시대 <서울연>을 재현한 작품
 


그런가 하면 중국 베이징시가 주최한 연축제(연날리기대회)에 한국 연날리기 대표 선수단 단장으로 참여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을 제치고 연속 우승을 거머쥐었다. 리 명장은 “신이 가장 좋아하는 게 연이다. 놀이마당인 하늘에 연을 날리니 얼마나 좋아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우리 국민과 세계인에게 전통 연을 알려나갈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에겐 바람이 하나 있다. 국내에 ‘연 박물관’을 세우는 거다. 중국에는 20만평 규모의 박물관이 있고 일본에도 있으나 국내에는 아직 없다. 리 명장은 “연 박물관을 설립해 1300여 점의 전통연을 기증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국민에게 추억과 향수를 느끼게 해주고, 역사와 교육적으로도 가치있게 사용되길 희망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전통연은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이다”라며 “외래문화에만 익숙해 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전통 문화를 접해 계속 발전·계승해 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