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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고분군

구간사회의 구지가,

가락국의 건국신화로 각색되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으로 가락국 형성의 비밀을 말하다


글 사진 신정미 사진제공 김해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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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입석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로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 구지봉(龜旨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천지가 개벽한 후에 이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옛날에 구간(九干)이 있어 이들이 백성을 다스렸으니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때마침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壬寅) 3월 계유에 구지봉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여기에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춰라”라는 말이 들려왔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구간 등이 구지가를 부르고 춤췄다. 그러자 곧 하늘에서 자색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에 금합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 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 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를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었다.

龜何龜何 (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수기현야)   머리를 내놓아라.
若不現也 (약불현야)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번작이끽야) 구워먹으리라.


가야사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주인공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하게 되는 무대인 구지봉.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龜首峯), 구봉(龜峯) 등으로 불린다. 김해 구산동 소재 이 작은 산봉우리는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구지가’의 산실로 국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봉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낮은 동산에 불과하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유적이다.

새로 세운 구지봉 입석과 함께 구지봉 남쪽 끄트머리 소나무 숲 안에 무려 2200년 전에 만들어진 고인돌(지석묘)이 구지봉임을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5~6개의 짧고 둥근 돌로 고여진 뚜껑돌 위에 한석봉 글씨라고 전해지는 구지봉석이란 글씨가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고인돌은 ‘구지가’가 노래되고 수로왕이 김해 가락국을 세우던 역사적 현장을 지켜본 살아있는 증인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이 가락국을 세웠던 해는 AD 42년이었다. 그러나 BC 2세기가 되면 남해안 지역에서도 구지봉석과 같은 고인돌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고인돌이 아무리 늦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기원전 2세기보다 더 내려올 수 없다. 그러기에 구지봉 고인돌은 적어도 수로왕이 나타나기 250년 전에는 만들어져 있
던 것이고, 수로왕 등장 시 지금 같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 가락국 성립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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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가 국립김해박물관 내의 벽면을 촬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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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고인돌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 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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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석(龜旨峰石) 구지봉 고인돌 상석에 새겨진 음각 글씨.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짐
 

   



이 고인돌은 누구의 무덤인가. 고인돌에서 청동기는 출토되지만 철기는 아직 출토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철기 이전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조상을 묻기 위해 만들었던 무덤이며, 수로왕 등장 이전에 아홉 촌장사회의 무덤임이 확인되는 셈이다.

총 4만 4911㎡의 사적범위에는 이 고인돌 이외에 당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특정 유구가 없다. 2001년 3월 7일에 구지봉이 경상남도기념물에서 국가사적으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1976년에 세웠던 건국신화의 6알을 상징하는 석조물이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같은 때 세워졌던 ‘駕洛國始祖大王誕降聖蹟碑(가락국시조대왕탄강성적비)’, 1908년 건립한 ‘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 등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락국, 도래한 선진 철기문화 집단이 토착집단을 통합하다

사적 제42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이곳에서 수로왕을 맞이하여 불렀다는 ‘구지가’가 가락국의 건국신화요, 가락국 탄생과 가야사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김해 가락국의 건국신화는 연구 분야에 따라서 천손강림 설화, 민속의례, 즉위의례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전승과정에서 많은 윤색이 이뤄지는데, 당대인의 역사 인식에 따라 가공의 사실이 첨가되기도 한다. 서기 42년에 가락국이 건국됐다거나 수로왕이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을 그 시대의 역사 사실로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수로왕 설화의 성격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붉은 폭(幅)에 둘러싸인 금합 속의 알이 하늘에서 산봉우리로 내려왔다’고 하는 천손강림과 난생설화 요소이다.

건국시조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는 단군신화와 같이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들어와 지역을 통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수로왕은 단순히 한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김해 지역으로 이주한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으로, 이미 김해 지역에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9간이 각각 대표했던 토착집단과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가락국이었을 것이다. 인제대 이영식 교수는 수로왕 집단이 선진의 철기문명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108년 한(漢)에게 멸망당한 위만조선의 후예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난생(卵生)설화와 관련이 있다. 알이 황금색이며 해처럼 둥글었다는 기록은 태양 숭배사상의 흔적을 보이는 것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이 천손이라는 관념은 선택된 사람이라는 후대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된 결과로서, 자신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피지배층에게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뤄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합법화하고 일반민들로 하여금 그 지배를 신성화하여 받아들이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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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수로왕릉 전경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돼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됐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구지가(龜旨歌), 수로왕 등장을 신성시하는 위협 주술의 노래

고고학 자료를 대비해보면 수로왕 등장 이전에 가락국은 9촌락이 있었고 구간이라는 아홉 촌장들이 리더였다. 구간이 불렀다고 한 ‘구지가’의 “머리를 내어라”에서 머리는 머리 수(首)에 나타날 로(露), 즉 나타난 우두머리 수로왕이었다. 그런데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면 매나 독수리 같은 새가 등장해야 맞는데 왜 거북이가 등장하는가.

원래 ‘구지가’는 수로왕 등장 이전에 아홉 촌락사회에서 부르던 노래로 고대인들이 소망을 빌 때 읊조렸던 주술(呪術, magic)의 노래였다. 주술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위협주술(뭐 안하면 뭐 하겠다) 또는 협박주술 형식이다. 인간이 신을 협박할 수 없으니까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메신저를 협박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기원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것처럼 인간이 신에게 직접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자(messenger)를 거치는 것이 보통이다.

위협주술의 패턴은 세계적이지만 우리 고대사회의 예를 들어보면 백제에서는 천신에게 기원을 할 때 매를 붙잡아서 좁은 틀 안에 가두고 물과 먹이도 주지 않고 괴롭히면서 소원을 들어달라고 노래를 불렀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산천신(산신)에게 기원할 때 노루를 붙잡아서 나무에 묶어놓고 창으로 찔러 괴롭히면서 비를 내리라고 노래를 부르면 산천신이 그 비를 내려줬다. 사슴은 산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산신의 메신저이고, 매는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천신의 메신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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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선전제례 경남 무형문화재 11호.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 모습
 





이와 비슷한 고대 주술의 노래로 ‘해가’가 전해지고 있다. 내용을 보면 8세기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지금의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서 남편 순정공과 강릉으로 가는 길에 동해 용왕이 수로부인의 미모를 탐내 납치해간다. 그러자 그 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중략)…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먹으리라”는 주술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자기 메신저인 거북을 협박하니까 용왕이 ‘하 이놈들 시끄럽다’고 수로부인을 내줘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얘기다.

똑같은 노래지만 김해의 ‘구지가’는 다르다. 수로왕이 김해 지역에 등장해서 가락국을 세우고 보니 자신의 출현을 신성시할 도구가 필요했다. 다행히 이 지역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구지봉과 구지가가 있어서 자신의 출현얘기를 담아서 부르도록 했지만 해신의 메신저인 거북을 괴롭혔는데 천신이 소원을 들어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됐던 것이다.

이영식 교수는 “‘해가’와 ‘구지가’에 대해 수로부인의 주술노래가 원형이고, 수로왕의 주술노래는 각색된 결과”라며 “원래 구지가는 구간사회에서 거북을 협박하면서 해신에게 ‘(우두)머리를 내어라’가 아니라 보다 많은 해산물(조개와 생선)이 잡히도록 비는 풍요제의에서 부르던 노래였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전해지는 구지가는 수로왕이 건국 후 이전에 있던 개혁주들의 노래를 고쳐서 자신의 용비어천가로 만든 것이며, 철기단계인 가락국 성립과 수로왕의 등장을 신성시하는 노래로 각색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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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수로왕릉(납릉) 사적 73호로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馬羊虎石) 등이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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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릉정문(納陵正門)의 쌍어문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문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수로왕시대 철기문화, 대성동고분군에서 보이다

가락국이 탄생된 사실은 김해지역의 고고학적 증거들로 설명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구지봉석 같은 고인돌들은 김해 전역에 깔려 있고,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부장품들에서 분명한 우열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락국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지는 목관묘(木棺墓, 널무덤)와 목곽묘(木槨墓, 덧널무덤)에서 처음으로 철기가 나타난다. 이들 또한 김해지역에 고르게 분포하지만 김해시 중심에 위치하는 것들만 대형화돼 있고 특별히 화려한 부장품들이 확인되고 있다. 대성동고분군 같은 김해시 중심의 목곽묘와 주변의 것에서는 너무나 분명한 우열을 보인다.

이영식 교수는 이에 대해 “구간사회시대가 수로왕시대로 바뀌면서 김해 전역에 퍼져있던 부와 권력이 대성동고분군을 기점으로 해서 김해시 특정지역으로 집중되고 있는 현상을 확인해 보이는 것”이라며 “다행히도 김해지역에는 건국신화인 ‘구지가’의 문자기록이 있고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의 교체양상을 짐작할수 있는 고고학자료가 있어 가락국 형성의 비밀을 풀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수로왕릉의 진정성

가야사의 첫 장을 열었던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서기 199년쯤에는 현재와 같이 높고 큰 무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야고고학의 상식에 비춰볼 때 지금의 수로왕릉 같이 높고 커다란 마운드를 가진 고분이 발견된 적은 없었으며, 이런 대형봉토의 고분이 출현하는 것은 5세기 이후나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당시의 분형을 하고 있지 않은 지금의 수로왕릉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다행히 ‘가야의 숲 조성부지’ 발굴조사 과정을 거쳐 수로왕 당대 지배층의 무덤이 바로 수로왕릉 옆에 인접해 있는 게 확인돼 수로왕릉이 대성동고분군(大成洞古墳群)과 같은 고분군이라는 진정성이 확보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야고고학의 상식과 현존하는 수로왕릉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은 661년 이 수로왕릉을 대대적으로 정비시키고 있다. 신라 문무왕은 왜 신라에 복속된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릉의 정비를 명했을까.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문명왕후)사이에 태어난 문무왕. 문무왕의 어머니는 가야계 여인이다. 김해의 가락국은 결국 신라 문무왕의 외가가 되는셈이다. 문무왕이 통일을 하고나서 외가 쪽의 시조 할아버지인 수로왕릉이 망한 나라라서 형편없어진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 하여 상산전 30결을 붙여서 정비하라고 명령하는 게 <삼국사기>에도 기록됐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그 당시 신라의 왕릉같이 개축을 했으니까 지금 같은 모습이 된 것”이라며 “그래서 충분히 2세기 당대에 수로왕릉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수 있지만 문무왕 때 개축을 한다고 하는 상산전 30결이면 그 당시 김해 땅 전부인데 거기에 나오는 소출을 가지고 정비를 하라고 했으니까 분형도 당연히 신라의 왕릉을 따랐을 거라고 생각하면 진정성도 확보가 된다”고 언급했다. 이어 “우리나라 최대의 성씨인 김해김씨는(2013년 인구센서스에서는 450만 정도, 김해김씨 집안에서는 600~700만이라고 함) 거기에 왕릉 제사를 계속 진행해왔는데, 전체 세계민족 중에서 보면 한국 최대의 성씨 집단들이 매년 자기 할아버지를 숭배하는 수로왕릉에 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세계유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속도”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