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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늘에 묻힌 명적(名蹟)을 찾아①


조선시대 사설 도서관 ‘완위각(宛委閣)’

숙종 대 벼슬 외면, 자연에 묻혀 산 담헌 이하곤의 만권 장서각
중국도서도 소장, 조선후기 소론 지식인의 문화적 공간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 전 충북도문화재 위원 자료제공 이정희(이하곤 선생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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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늘에 가리어 빛을 찾지 못하는 명적. 과거 찬란한 역사를 간직했으면서도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진 유적들이 전국에는 수없이 산재해 있다. 그 현장을 찾아 내력을 탐구하고 역사를 복원하는 노력을 시작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고 했다. 이 불후의 명구는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노래에 나온다. 두보의 ‘백학사모옥(柏學士茅屋)’의 일부를 보자.


富貴必從勤苦得(부귀필종근고득)
男兒須讀五車書(남아수독오거서)

부귀는 반드시 애써 노력함에서 얻어지는 것이니
남아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네

불우한 조선의 여류 허난설헌은 두보의 시에 심취하여 그를 정신적 연인으로 삼고 살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허난설헌은 왜 평생 두보를 그리워하며 살다 간 것일까. 두보의 시에 묻어난 지성과 사랑, 따뜻한 마음이 좋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책 사랑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는지 모른다.

두보의 노래처럼 유교사회 선비들은 무릇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지식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수레라면 몇 권의 책을 말하는 것인가. 중국의 고문을 보면 약 1만 권이라는 해석이 있다.

책이 귀했던 시절 선비들은 어떻게 많은 서적을 얻었으며 읽을 수 있었을까. 자신이 필요한 책을 얻기 위해선 큰 고난이 따랐다. 대부분 선비들은 책을 빌려 몇 달 동안을 베끼는(수사手寫 혹은 필사筆寫) 수고를 해야 했다. 재력이 따르지 않으면 또 서적을 구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도 책을 구입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송나라 시기는 물론 명, 청조 시대에도 금수(禁輸) 목록이 많아 외국에 반출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 사신의 종자들인 역관을 시켜 몰래 책을 구입하거나 이들이 가지고 온 책들을 비싼 가격을 주고 사야했다.

당시 다섯 수레의 책, 1만 권의 서적을 수장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기적의 역사가 18세기 초 한반도 중앙 진천 초평에서 이루어졌으며, 지금 후학들이 희미해진 잔영을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진천 초평에 조선시대 사립도서관 ‘완위각’

조선 숙종 대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서적 1만 권을 수장한 사립도서관 ‘완위각(宛委閣, 일명 만권루萬卷樓)’이 있었다. 완위각은 조선시대 4대 도서관의 하나로 회자 되었다. 조선후기 문신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독서차기(讀書箚記)>에는 진천 이하곤의 완위각을 위시, 안산(安山) 류명천(柳命天), 류명현(柳命賢) 형제와 서울 이정구(李廷龜) 후손가등이 18세기의 4대 만권당임을 적시하고 있다.

‘완위’란 무슨 뜻인가. 중국고문에는 장서(藏書)혹은 한림(翰林)이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역사서 춘추(春秋)에는 하왕조의 시조인 우(禹)임금의 능(陵)이 ‘완위산’에 위치한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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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위각 건물지 조사 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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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의 부친 이인엽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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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 생가 큰사랑채
 



‘구의산(九疑山) 동남에 하늘기둥처럼 완위산(宛委山)이 있는데 적제(赤帝)는 그 산 위의 궁궐에 살고 있다. 그 산의 정상에는 책 한 권이 있는데 무늬는 보옥으로 받침하고 넓고 두터운 돌로 뚜껑을 덮어 놓았다. 그 책은 금간(金簡)에다 글자는 푸른색 문자로 써서 흰색 은(銀)으로 끈을 만들어 놓았으며, 옥(玉) 문자들은 모두 금간 위에 볼록하게 붙여져 있다.’

청나라 후기 학자이자 명필가 완원(阮元)은 자신의 서재를 ‘완위별장’이라고 호칭했다(如 清 阮元 所辑丛书 名 ‘宛委别藏’ 即取意于此). 완원은 바로 추사 김정희가 숭배했던 인물. 추사는 20대 초반 연경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완원을 만나 필담으로 경서를 논의한바 있는데 그를 평생 흠모하여 자신의 아호를 완당(阮堂)이라고까지 지었다.

완위각 주인 담헌 이하곤

장서각의 주인공은 담 헌 ( 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다. 담헌은 경주이씨 명문집안의 자제로 과거에 올랐으나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산 유아한 풍모의 선비다. 담헌의 선조인 익재 이제현은 고려 충선왕대 충신으로 동국시계의 종정으로 숭앙을 받는 인물. 심양에 만권당을 짓고 학문을 숭상했다. 담헌이 장서각을 속칭 ‘만권루’라고 이름 한 것은 익재의 문숭(文崇) 풍모를 사랑하여 그 유풍을 계승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담헌의 자는 재대(載大). 계림(鷄林)이라는 호를 병행하여 썼다. 임진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운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 형조판서)의 증손자로서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손자이며, 당시 한성좌윤과 이조판서를 지낸 회와(晦窩) 이인엽(李寅燁)의 장남이다.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 최명길의 손)은 그의 고모부(姑母夫)가 된다.

1708년(숙종 34) 처음 진사시에 합격, 세마부수(洗馬副率, 정7품)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담헌은 이 시기 서울과 진천을 자주 오르내린 것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을 보면 담헌은 그의 나이 25세, 29세 때 진천을 일시적으로 찾았고, 35세 때는 가족을 거느리고 낙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32세 되던 숙종 34년 과거에 응시해 진사과에 장원했다. 담헌은 두 차례의 관직을 모두 사양했다. 병을 구실로 삼아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의 머릿속에는 금강산을 화폭에 담아보고 싶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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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이 찍힌 완위각(만권루)에 소장된 책
 



담헌은 이 시기 항상 ‘진천으로 낙향’을 그렸던 모양이다. 진천은 ‘생거 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去龍仁)’이라고 불일 만큼 살기 좋았던 곳으로 그가 처음부터 고향으로의 낙향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문명이 높았던 친구 동계(東谿) 조구명(趙龜命, 1693~1737)은 담헌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경세제민을 스스로 기약하여 이미 치병이재(治兵理財)와 당세의 시무에 관한 군서를 박람하여 두루 통섭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뛰어난 언변이 골짜기를 물이 터져 시내가 흐르는 것처럼 시원하고 거침이 없었다. <동계집 중 담헌애사>”



그는 왜 영화가 보장되는 벼슬을 멀리하고 진천으로 내려가는 것을 생각했을까. 담헌은 제일 먼저 정쟁을 싫어한 것 같다. 담헌 자신의 가문은 소론이고, 스승 김창협과 장인 송상기는 노론계였다(증조 이시발의 신도비는 조부 이경억의 부탁으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지었다. 방대한 신도비문은 명문장으로 임진전쟁과 이괄의 난 등 시대사를 입증하는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그가 그림으로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던 화가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남인계 집안이었다. 담헌은 두타초에서 당시 복잡했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참으로 출처가 어렵기도 하네(世亂方知出處難)”.

가산을 털어 책 구입

담헌은 증조부 시기부터 내려온 많은 전적에다 자신이 더 많은 양의 전적을 모았다. 그가 책을 수집하기 위하여 기울인 노력은 대단했다. 대부분 가산을 축내 책을 모았다고 한다. 아들 이석표(李錫杓, 1704~?)가 지은 <담헌행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유독 서적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책을 파는 사람을 보면 심지어 옷을 벗어 책을 사니, 모아놓은 것이 거의 만권에 이르렀다. 위로는 경사자집(經史子集)에서 아래로는 패관소설, 의서, 점술서, 불가서, 도가서 등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완위각은 조선의 대표적인 장서각으로 널리 회자되었으며 다양하고 풍부한 장서를 수집하였다. 전문가들은 완위각 소장 서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 당시 명사들과의 교유 속에서 장서루로 인식되었고 꾸준히 활용되었다. 둘째, 경사와 문집은 물론 서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축적하였다.

셋째, 완위각에는 상당수의 중국도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넷째, 한말 소론 지식인들의 문화적 공간이자 은신처였다

조선을 뛰어넘는 해박한 지식의 명 화가

담헌은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였다. 그의 이런 재주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증조부 벽오 이시발의 부인 덕수 이씨는 바로 신사임당 아들 이우(율곡의 동생)의 셋째 따님이다. 어린시절부터 예술적 가풍 속에 산 부인 이씨는 난(蘭)을 잘 쳤다. 이 씨의 작품 난 4점이 전해져 오는데 지금도 금방 그린 것 같은 기품을 보여준다.

부인은 거문고를 잘 타 율곡으로부터 보금(寶琴)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남편이 왕명을 받고 임지로 갔을 때 임신한 몸이었는데 출산하면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담헌의 모친은 임천조씨로 역시 외가에도 서예가와 문장을 날린 이들이 많았다. 이런 예술가의 집에서 태어난 담헌은 어린 시절부터 글씨와 그림에도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증조부, 조부, 부친이 모두 모두 명필의 반열이었다.

담헌은 많은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존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도원문진도(桃園問津圖)>는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그림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복사꽃이 화사한 봄 신선들이 도원경을 찾는 그림이다. 혹 괴산 청천 무릉도원리 풍경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그는 중국의 역대 화가들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두타초에는 송대의 마원, 하규, 조영량, 마화지, 원대의 조맹부, 천선, 명대의 심주, 이재, 동기창, 청대의 맹영광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평론하고 있다. 그가 당대 제일 유명했던 화가 겸재 정선과 윤두서를 친구로 교유한 까닭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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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이 그린 그림
 



담헌은 겸재와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 겸재를 명나라 말기 재상이었던 동기창에 비교했으며 그 인격을 높게 평가했다. 겸재가 진천을 방문한 날 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두 사람은 붓을 잡고 두타산 폭풍우 풍경을 함께 그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담헌은 겸재의 그림 무척 사랑했고 겸재는 담헌에게 그림 30여 점을 선물하기도 했다.

당대의 명필가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찾아와 ‘완위각’이라는 현판을 써줬으며 백하의 제자였던 명필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도 ‘만권루(萬卷樓)’라는 현판을 쓰고 갔다.

담헌은 또 충북 보은 마로에 있는 익재(益齋) 영당을 찾아 화상찬(畵像讚)을 짓기도 했다. 필자는 이 화상찬으로 인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110호 익재영정의 출처가 보은 마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담헌은 유려한 필치로 익재영정에 대한 소견을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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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의 문집 <두타초>
 




백성들의 삶 고발 한 번뜩이는 실학의 눈

바람과 이슬은 이미 천지에 가득 찼고
달빛은 다시 밝고 깨끗해졌네
숲속의 나무는 맑은 거울을 품고
맑고 맑아 머리털조차 비운다
은하수는 저절로 맑고 얕아지는데
뜬 구름은 때대로 점점이 떠 있다.
눈 찡그리며 광경을 보니
기이한 볼거리는 이것이 제일이네

담헌이 두타산을 바라보며 노래한 낭만적인 시다. 그의 산수에 대한 사랑은 조부 이경억(李慶億)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그가 남긴 유고 두타초를 보면 산수기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는 <독서유감>이란 시 3수에서 벼슬을 버리고 책속에 묵혀 산 이유를 이렇게 노래한다.

내 집에 무엇이 있을까 마는
서가에 만권의 책을 꽂아 놓고
물마시고 육경을 읽으니
이보다 더한 맛이 무엇일까?

담헌이 자연만을 음영한 것은 아니다. 그의 날카로운 시관(詩觀)은 민생을 언급하며 백성들의 빈궁한 삶을 고발하고 있다.

구휼미 방출한단 소리 없으니
구렁에 빠진 민도(民徒) 누구 보살피나
야윈 몰골 오직 마른 풀 잎 같고
살도 빠져 굶주린 까마귀 같네
(하략)

담헌은 왕실 도자기를 굽던 광주 사옹원 분원을 답사하면서 고난에 찌든 도공들의 삶에는 눈시울을 붉힌다.

옹기쟁이 이산 모퉁이에 살아
오랜 관가의 부역 역시 고난하구나
스스로 말하길 지난해 고개 넘어가서
진주의 백토 배에 싣고 왔다 하네

담헌 시의 특징은 진시(眞詩)라는 데 있다. 그는 자연에서 나오는 인간의 성정(性情)을 사실적으로 묘사, 우월한 경지를 표출했다. 작품 속에는 만권의 장서를 탐독하여 쌓은 지성이 녹아나고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인자함이 묻어있다. 그의 시 가운데는 실학의 기운마저 샘솟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담헌의 유고는 <두타초(頭陀草)>로서 전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다. ‘두타’는 불가의 용어로 탐욕을 버리고 수행을 닦는 것을 뜻하지만 그가 살았던 초평 두타산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집은 담헌이 평생 써온 시와 서, 제문(祭文), 애사(哀詞), 소(疏) 등 모두 47편으로 구성돼 있다.

위당 정인보 선생도 소년 시절 완위각에서 수학

한말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1893. 5. 6~1950. 11)은 어린 시절 완위각을 다니며 수학했다. 위당은 1893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11세 되던 해 초평으로 왔다. 위당은 이 시기에 완위각에서 한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위당의 해박한 학문은 바로 완위각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것이 큰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완위각은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불에 탔으며 초라한 모습으로 내려오다 몇 년 사이 충북도 문화재지정을 위한 발굴조사 작업이 이뤄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옛 모습으로 복원되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후손들과 진천군, 충북지방 국문, 역사학계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완위각에 소장되어 있던 만권의 서적은 전란과 격동을 거치면서 대폭 줄어들었다. 현재 9대종손 이정희(85)씨가 7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필자가 이정희씨 집을 방문했을 때 소중히 포장된 현판을 보여주었다. 바로 석파 이하응(대원군)이 쓴 ‘경주이씨화수실(慶州李氏花樹室)’이란 현판이다.

대원군은 한때 진천 완위각을 찾아 당시 이 씨 가문의 위선(爲先)과 문숭(文崇)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전직 금융인 출신인 종손 이 씨는 담헌의 부친인 회와 이경억의 영정 4점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소중히 간직된 이 영정들은 보물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종손이 소장한 전적들은 완위각이 완공된 후 현지에 소장되게 되면 국학 연구 자료로 활용되게 된다.

충북의 한 연구단체는 ‘초평(草坪)’이 영어로 ‘그린 필드(Green Field)’란 점에 착안, 도시의 대형서점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 삼아 책을 즐기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완위각을 창조적 환경으로 조성하자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즉 완위각을 중심으로 일대에 ‘그린필드 책마을’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이제 역사의 그늘에 묻혀 사라져야 했던 조선 민간 최대 도서관 완위각. 유아한 선비들의 요람이 재단장되어 정신문화 교육의 도량으로 활용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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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 선생 후손 이정희 씨가 대원군 친필 ‘경주이씨화수실’이란 현판을 설명하고 있다.
 




담헌 이하곤 연보(年譜)

숙종 3(1677) 3월 24일 태어나다.

숙종 10(1684) 〈번서추조樊墅秋早〉라는 시를 짓다.

숙종 19(1693) 이즈음 송상기(宋相琦)의 딸 은진송씨(恩津宋氏)와 혼인하다.

숙종 21(1695) 모친상을 당하다.

숙종 23(1697) 복(服)을 마치고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에게 나아가 수학하다.

숙종 26(1700) 조문명(趙文命)에게 편지를 보내 학문에 대해 논하다.

숙종 30(1704) 부친의 임소인 강화(江華)로 따라가다. 이때 시록 심주록(沁洲錄)을 남기다.

숙종 31(1705) 충청도(忠淸道) 진천(鎭川) 금계(金溪)로 내려가다.
        딸 이봉혜(李鳳惠)를 잃고 제문과 광지(壙誌)를 짓다.

숙종 34(1708) 생원과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다.

숙종 36(1710) 부친상을 당하다.

숙종 37(1711) 진천(鎭川) 금계(金溪)로 다시 내려가다.
       •부친이 지었던 향제(鄕第)에 도서를 비치하고 ‘만권루(萬卷樓)’라고 일컫다.

숙종 39(1713) 음직(蔭職)으로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숙종 40(1714) 관동을 유람하고 금강산을 다녀와 동유록(東遊錄)을 짓다.
        •부솔(副率)이 되었으나 사은 후 곧 사직하다.

숙종 42(1716) 속리산을 유람하고 청천(靑川) 사담에 머물다.

숙종 46(1720) 숙종(肅宗)이 승하하자 국장돈장관(國葬敦匠官)으로 차임되었으나 사직하다.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있자 〈유혹(喩或)〉을 지어 해명하다.

경종 1(1721) 당쟁으로 시사(時事)가 어지러워지자 과업(科業)을 포기하다.

경종 2(1722) 장인 송상기(宋相琦)가 강진(康津)으로 귀향가자 찾아가는 길에 호남 지방을 유람하다.
      남행집(南行集)〈남유록(南游錄)〉을 짓다.

경종 3(1723) 송상기(宋相琦)의 부고(訃告)를 듣고 제문을 짓다.
      •스승인 김창협(金昌協)이 무함(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못된 구렁에 빠지게 함)을 받자 어유봉
      (魚有鳳) 등 동문(同門)과 변무소(卞誣疏)를 올리니, 간원 조지빈(趙趾彬)의 탄핵을 받다.
      •겨울, 세사(世事)에 뜻을 끊고 진천(鎭川) 금계(金溪)로 내려가 은거하다.

경종 4(1724) 병으로 별세하다. 양지(陽智) 신창리(新倉里) 선영(先塋)에 장사 지내다.

영조 6(1730) 아들 이석표(李錫杓)가 행장(行狀)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