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손정도 목사(3)

상해 임시의정원, 만주 선교사업, 김일성과의 만남


글. 이정은


01.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1919. 10. 11, 1줄 왼쪽 신익희, 안창호, 현순, 2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02.jpg
손정도 목사
 



1913년 11월 5일 진도유배에서 풀려났다. 진도에 있었던 1년간 제자가 생겼다. 신문명과 신지식에 목마른 청년이었다. 손정도는 제자가 된 19살 허도종(許道宗)을 데리고 평양행 길을 떠났다. 도중에 서울에 들려 청년을 배재학당에 입학시켰다. 허도종은 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평양 집에 도착했다. 1년 6개월만이다. 부인은 손정도를 몰라봤다. 고문으로 몸과 얼굴이 몰라보게 상하여 있었던 거다. 그해 겨울 가족과 지내며 몸을 추슬렀다. 이듬해 1914년 6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1년에 중국 선교사로 나가는 바람에 안수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중국 선교지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국은 요시찰 ‘정치범’이 해외선교를 ‘빙자’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까 우려했다. 감리교 연회는 손정도의 사역지를 서울동대문교회로 바꿨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불안한 시국에서 서양 기독교가 급성장할 때 동대문교회는 그 대표적인 ‘불타는 영성’의 교회였다. 동대문교회는 10개의 딸린 교회와 부속 남녀 학교가 있어서 담임목사가 돌봐야 할 교인과 학생이 1천 500명이나 됐다. 부흥목사, 독립운동가, 최초의 외국 선교사 경험을 가진 손정도 목사의 애국설교를 듣기 위해 청년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동대문교회는 정동제일교회, 상동교회와 버금가는 교회로 성장했다. 손정도는 외국선교의 열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1915년 감리교 연회는 손정도를 중국 대신 정동교회로 파송했다. 정동교회는 서울에서 제일 큰 교회였다. 교회 양옆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학생들도 정동교회에 참석했다. 손정도는 예배당을 배로 늘려야 했다.

예배실의 남녀 구별 휘장도 걷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는 여기서도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했다. 이 무렵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진학했다. 유관순도 매주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손정도 목사는 전국 각지에서 초청을 받아 설교와 강연을 했다.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개인적으로 정동교회 시기에 손정도는 명성과 함께 가장 안정된 삶을 살았다. 자녀들이 태어나 자라는 행복한 시기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
1918년 7월 초 손정도는 갑자기 건강을 이유로 1년간 휴직계를 냈다. 후임은 이필주 목사가 맡았다. 그가 감리교를 대표한 3·1운동민족대표였다.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는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함께 이화학당 교사 하란사와 은밀하게 의친왕의 중국 망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서거했다. 의친왕이 상주가 되어 망명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상복을 입고 밤기차로 압록강을 넘어 북경으로 가서 현순 목사와 하란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북경에 도착한 하란사가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3월 10일 목숨을 잃었다. 하란사를 평화회의가 열리는 파리로 보낼 계획이 좌절됐다. 현순 목사와 함께 3월 25일 상해로 갔다.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손정도가 갑자기 사라지자 평양의 일본 경찰은 수시로 아내를 불러 신문했고, 가족 주변을 감시했다.

   


03.jpg
정동교회
 
04.jpg
<대한민국 임시정부헌장(1919. 4. 11)>


3·1운동이 시작되자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집결했다. 신규식과 여운형, 선우혁, 서병호 등은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북경에서 조소앙, 조성환, 만주에서 이회영과 이시영 형제가, 연해주에서 이동녕, 일본에서 이광수가 상해에 모였다. 손정도가 도착한 이튿날인 3월 26일 저녁 프랑스조계 보창로 329호에 임시사무실을 개설하고 첫 회의를 열었다. 최고기관 설치를 논의할 8인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논의는 분분했다.

손정도는 각 지방 대표들로써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4월 10일 밤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가 열렸다.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와 백남칠이 선출됐다. 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새로 세울 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이며, <대한민국 임시헌장선포문>과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선포했다. <임시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수백년 전제군주제의 극복을 선언했다. 제2조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임시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함을 규정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했다.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을 선언했다. 귀족제나 양반제도를 철폐하고 자유의 나라를 선포한 것이다.



05.jpg
이필주 목사 서대문 감옥 수형 사진
 


국무총리 이승만, 외무총장 김규식, 내무총장 안창호 등을 내각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선을 결정지었다. 국무총리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이동녕이 임시 국무총리를 맡았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부의장인 손정도가 의장을 맡게 되었다. 5월 25일 미국에서 도산 안창호가 도착하였다.

안창호와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는 힘을 합하여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안창호는 미국 동포들이 모금한 자금으로 임시정부의 위신이 드러낼 수 있는 번듯한 건물을 마련하여 태극기를 게양했다. 상해 프랑스 조계 하비로 321호, 잔디밭에 2층 양옥의 건물이 임시정부청사였다.

1919년 9월 11일 손정도 의장의 임시의정원은 통합임시정부의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66명의 임시의정원이 구성됐으며 임시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을 선출했다. 임시대통령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 각부서의 장관격인 총장들도 선출했다. 그중에 상해에 있는 사람은 안창호뿐이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통합과 단결을 위해 스스로 노동국 총판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상해에서의 손정도 역할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는 임시의정원 의장에 그치지 않고 임시정부 교통총장, 인성학교 교장, 의용단과 노병회 창설, 대한적십자회장에다 상해한인교회 목사를 겸했다.

그러나 상해 독립운동계는 분열했고, 권력암투·음모·정치투쟁에 빠져들었다. 임시정부를 유지하느냐, 해체하고 새로 조직하느냐를 놓고 몇 달간이나 회의를 했다. 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대부분이 임시정부를 떠났다. 본질적으로 종교인이었던 손정도에게 권력투쟁이 난무하는 상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도 악화됐다.



06.jpg
임시정부 청사 모습. 걸려있는 태극기가 선명하다.
 
07.jpg
길림 육문 중학교 김일성 주석 도서관의 기념실
 


길림에서
1924년 1월 손정도는 만주의 길림으로 떠났다. 만주 선교사업은 오랜 꿈이었다. 만주 상황은 상해보다 더 어려웠다. 만주의 한인들은 중국인 지주, 만주 군벌, 마적단에게 말도 못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1년 농사를 지어도남는 것이 없었다. 거기다 흉년까지 들어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길림으로 가족들을 불러 왔다. 그는 길림교회와 신참교회를 담임했다. 두 예배당은 180리나 떨어져 있었다. 매주 그는 두 교회를 오가며 예배를 인도하고 교인들을 방문했다.

한인교회는 중국인 교회를 빌려 목회를 하고 있었다. 1년 후 50평 규모의 예배당을 마련했다. 1924년 여름에는 흉년이 들었다. 그는 목회와 함께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양기탁과 함께 귀화 조선인 생계회를 조직했다. 길림성장도 만났다. 한인들은 손정도의 교회를 피난처로 생각했다. 만주 독립운동가들은 자주 목사 사택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안창호와의 연락은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이 만나면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아내는 남편에게로 들어오는 돈이 다른 사람에게로 다 새어 나가자 동포 최영만의 정미소에 나가 쌀에서 돌을 골라내는 품을 팔아 가족과 손님 접대하는 비용에 보탰다. 일제 영사관 경찰은 그와 그의 가족 주변을 맴돌았다. 중학생 아들 손원일이 연설회에 참여했다는 사실까지 보고하며 ‘손정도의 아들’이라고 강조했다.

소년 김일성을 돌봄
손정도가 길림에 있는 동안 북한의 김일성(본명 김성주)을 돌보게 됐다. 김성주는 김형직(金亨㮨, 1894~1926)의 아들이었다. 손정도보다 12살 아래 김형직은 평양 근처 대동군 출신으로 숭실학교 후배였다. 1917년 숭실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국민회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했다. 김형직도 이 조직에 가담했다. 이후 1918년 2월 조선국민회가 탄로나 김형직도 체포됐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는 1919년 3월 평양 3·1운동에 참여하고 그해 5월 만주로 넘어가 장백현 팔도구에서 순천의원을 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1926년 6월 김형직이 무송에서 사망했다. 아들 김성주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길림의 손정도를 찾아왔다. 손정도는 소년 김성주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훗날 1991년 손정도의 아들 손원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만났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길림에 가서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고 연계가 깊었던 손 목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손 목사의 집은 길림시 우마항에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가니 손 목사는 몹시 반가와 했습니다. 나는 길림에서 아버지의 친구들인 독립운동가들의 소개로 (중략) 길림육문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한 학년을 뛰어넘어 2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길림에 와서 육문 중학교에서 3년 동안이나 공부할 수 있은 것은 손정도와 같은 아버지의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손정도 목사는 어머니의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겨우 유지되어 가는 우리 집의 구차한 살림살이를 걱정하면서 나에게 학비를 여러 번 보태 주었다. 목사의 부인도 나를 몹시 사랑해줬다.”

김일성은 손정도의 자녀들과 친했다. 1930년 5월 김일성이 공산주의 독서회 사건으로 붙잡혀 갔을 때 손정도는 친구의 아들을 구해 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돈도 많이써서 결국 재판에 회부되지 않도록 빼냈다.


08.jpg
길림 육문중학교 김일성 주석 기념관에 걸려 있는
김일성의 청년시절 사진
 
09.jpg
정동길 만세시위
 


그 후 김일성은 본격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돈화 방면으로 떠났고 손정도는 그전 1월에 길림교회와 액목현교회 담임을 사임했다.

분열과 갈등이 그치지 않는 만주 독립운동계에 한계를 느꼈으며 건강도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요양을 했다. 그 후 길림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길림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손정도는 1931년 2월 19일 길림 동양병원에서 별세했다. 손정도 목사에 대해서는 이덕주의 <손정도-자유와 평화의 꿈(신앙과 지성사, 2020)>에 잘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