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손정도 목사(2)

목회자의 길, 독립운동가의 길


글. 이정은


01.jpg
감리교신학대학교 전경(1910년대)
 

목회자의 길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의 4년 과정을 마치고 제5회로 졸업한 손정도는 숭실대학에 입학했다가 곧 그만 두었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인 그는 감리교 신학교인 협성신학교가 1911년에야 서울 냉천동에 섰기 때문에, 그전에 운영했던 신학회(神學會)라는 이름의 목회 훈련과정을 해야 했다. 신학회는 지원자들이 농한기에 서울, 평양, 인천 등지 교회를 한 번에 한 곳씩 옮겨가며 한두 달 합숙교육을 받았다. 그때는 한국사에 특이한 ‘사명의 시대’였던 것 같다. 독립운동의 길과 마찬가지로 앞날이 불투명한 목회자의 길에 한 기수 126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으니 말이다.



01-1.jpg
손정도 목사
 


손정도는 그들 중 하나로 1908년 9월부터 10월까지 신학회 서울 수업을 들었다. 독립운동가 현순과 3·1운동 민족대표 최성모, 신홍식, 공주 만세시위의 현석칠, 한국인 최초의 감리교 목사 최병헌, 신민회 독립운동가들의 본부였던 남대문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도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 시기 도산 안창호는 서울 남대문 밖 김형제 상회 2층을 본부로 삼아 전덕기 등과 비밀조직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김형제 상회는 황해도 장연의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첫 개종자 김윤오가 경영했는데 손병도는 이 시기 김윤오와 그의 이복동생 세브란스의사 김필순, 도산 안창호, 전덕기 목사 등 민족진영 기라성 같은 인물들과 친형제 이상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09년 3~4월에는 평양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해 6월 23일부터 29일까지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미감리회 연회가 열렸는데, 그 연회 때 손정도는 전도사 직첩을 받고 진남포교회로 파송됐다.

1896년 한 가정집 사랑방에서 시작한 진남포교회는 1905년 8칸짜리 예배당을, 1908년에는 신도가 늘어 예배당을 배로 증축하고도 비석리에 지교회를 내었고, 삼신학교라는 부속학교도 운영하는 번성하는 교회였다.

진남포교회로 파송된 것은 진남포 교인들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손정도가 숭실학교 학생 때 그곳에 부흥사로 가서 부흥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거듭난 신도와 새로 들어온 신도가 합해 500명이 증가하는 큰 이적이 일어났었다. 진남포교회 사람들은 손정도 전도사에게서 그런 부흥을 다시 보고자 한 것이다.

진남포교회로 간 손정도 전도사는 구역 담임자 루퍼스(W.C Rufus) 목사와 함께 사경회를 열었다. 사경회는 성황을 이루러 160명의 새 신자를 얻었다. 진남포 교회는 곧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예배당을 지어야 했다. 진남포교회는 그 시기 한국에서 가장 부흥하는 교회로 꼽혔다.

손정도는 진남포교회에서 목회와 신학공부를 병행했다. 1909년에는 9월부터 3달 동안 개성에서, 1910년에는 3월부터 서울에서 2달 동안 신학회 수업을 들었다.

한국인 최초의 외국 파송 선교사
1910년 서울 수업이 끝나고 5월 11일에서 19일까지 정동교회에서 미감리교 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미감리교는 처음으로 해외 선교를 결의하고,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됐다. 당시 중국에서는 1900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이 학살당하고 외국인에 대한 반감과 배척이 심하여 서양인들이 선교하기 매우 어려웠다. 한국은 감리교 선교사를 받아들인 지 25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손정도가 중국 선교사로 가게 된 데에는 선교와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뜨거운 열정과 더불어, 신민회 동지들과 교감하는 가운데 만주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02.jpg
진남포 조선인 거리(1930년)
 
03.jpg
좌)평양 감리교 선교부 건물, 우)진남포 항구
 


때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가 있은 지 6개월 남짓 지난 살벌한 때였다. 격앙한 일제는 3개월 전인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를 여순감옥에서 처형하고 대한제국의 병합을 서두르고 있었다. 국내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워지거나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신민회의 동지들은 그런 상황을 예상하고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1910년 6월 1일 손정도는 진남포교회에서 연 송별식에 참석한 후 평양 집에 잠깐 들렀다가 곧바로 만주로 떠났다.


04.jpg
진덕기 목사.
신민회의 본부격인 상동교회 목사로서 손정도의 동지였다.
 

한국에서 노블 등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가서 중국에서 봉사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만나 한국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하며 협조를 구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선교사가 50년 먼저 들어간 일본 교회도 중국에 선교사를 보냈으나 실패했다.”

“중국 교회도 미국의 태평양 연안 도시의 중국인 사회에 선교사를 보냈으나 실패했다.”

“선교사가 파송된 지 25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 교회가 중국 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까?”

노블 등 한국에서 간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1907년 대부흥운동과 그후 한국 교회의 폭발적 성장과 질적 변화를 설명하며 설득했다. 중국 선교사들은 그제야 ‘실험적으로 시도’해 보기로 동의했다. 선교지는 만주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인 산해관으로 정하고 만주에 있는 손정도를 불러왔다. 산해관 선교를 맡기면서 노블 선교사는 손정도에게 말했다.

“고구려 영토에서 기독교 복음으로 만주를 점령하는 겁니다.”

손정도는 산해관에서 191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어학훈련에 집중하며 틈틈이 교회에 참석하거나 거리로 나섰다.

“여섯 달 동안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다.”

현지의 킬러 박사는 손정도가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 이야기를 중국인 신도들에게 했다. 산해관에서 50㎞ 남쪽 내륙의 ‘창여’라는 곳의 중국인 신도들은 가슴이 찔려 회개하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선교 노력의 첫 열매였다.

고국에서 망국의 소식이 들려왔다. 산해관에서 첫 결실을 맛본 손정도는 고국의 동포들에게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감을 가지라”고 권고했다.



05.jpg
감시를 따돌리고 중국으로 탈출하여 청도에서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모색하던 때의 안창호(1910년경)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향하여
1911년 7월 선교지가 북경으로 바뀌었다. 그는 미국의 안창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협의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가 터졌을 때 안창호는 그 배후로 의심받아 평양 대성학교에서 용산 헌병대로 강제 연행되어 3개월 동안이나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살아서 나갈 길이 없을 것 같자 안창호는 헌병대 안에서 자살 기도를 했다. 헌병대는 그를 병보석으로 잠시 풀어 주었다. 안창호는 그 길에 감시를 따돌리고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 후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를 둘러본 후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 있었다. 손정도는 안창호에게 만주에 병원을 세워 만주인들의 마음을 얻고, 이후 토지를 확보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설립하여, 만주인들과 연대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구상을 나누었다. 도산도 같은 생각이
었다.

1911년 11월 국내에서 105인 사건 소식이 들려왔다. 일제가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꾸며 서북지방 신민회 동지 수백 명을 잡아들여, 지도자급 105인을 2~4년이나 감옥에 가두어 신민회 조직을 와해시키고자한 사건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손정도의 동지들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토지를 매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들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형님, 우리들은 어떻게 하오?”

손정도는 당시의 암담한 심정을 도산에게 토로했다. 그즈음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불길로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곧 정세는 불확실속으로 빠져들었다.

1912년 3월 5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교 연회 마지막 날 손정도의 선교지가 북경에서 하얼빈으로 바뀌었다. 신해혁명 후 북경은 혁명파와 반혁명파로 군사적 충돌까지 벌어져 위험해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손정도 자신이 2년간 중국어와 중국 현지 적응력이 커졌다. 그는 이제 중국과 러시아 사이 국경지방이며. 러시아의 조차지로 일본 군경이 없고, 안중근 의거의 성지인 하얼빈에 본격적으로 독립군 기지 건설에 착수할 때라고 생각하여 자원했기 때문이었다.




06.jpg
러시아 조차지 옛 하얼빈 러시아풍 건물의 시가 그림엽서
 
07.jpg
러시아풍의 하얼빈 거리
 

손정도는 하얼빈에서 좋은 동역자를 만났다. 블라디보스톡에서 3년간 선교사업을 했던 장로교 파견 선교사 최관흘(崔寬屹) 목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선교 사업을 하게 되었다. 최관흘 목사는 서방 개신교의 전파를 극력 우려하는 동방정교회의 나라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추방을 당하여 1912년 5월 하얼빈으로 와서 새로 개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달 만에 중국인 3명, 한국인 40명의 교인을 얻는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시내 송화강 북부 선창가에 부지를 구입하고 2층 양옥 교회건물을 지었다. 또한 교회 자녀들을 위해 동흥학교를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구심점 하나가 생기게 되었다.

하얼빈의 러시아 정교회와 일본 영사관이 손정도의 교회를 주시했다. 특히 일본 영사관 경찰은 손정도의 활동을 단순한 선교활동으로 보지 않고, 밀착 감시했다. 동흥학교 학생들에게 한 손정도의 설교 내용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려는 의도를 간파했던 것이다.

1912년 7월 14일 일본 수상을 지낸 가츠라타로(桂太郞)가 러시아와 만주와 몽골을 교환하자는 비밀협약을 위해 러시아로 가는 길에 하얼빈을 지나갔다. 1주일 후 하얼빈 시내 100여 호 한인 집들에 러시아 경찰이 들이닥쳤다. 90여 명이 연행되어 갔다. 일본과 러시아 경찰의 합작품이었다. 그중에 30여 명은 계속 갇혀 조사를 받았다. 손정도와 최관흘 목사도 그중에 있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복사판인 ‘가츠라암살음모사건’이란 조작사건이었다. 1년 전에는 일제가 105인 사건으로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면, 이번에는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일대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정교회 사제가 러시아로 귀화나 정교회로 개종을 압박했다.


08.jpg
영화배우 율 부린너가 어린시절을 보낸 하얼빈 거리(1930년대)
 


1912년 8월 손정도는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남산의 조선총독부 경무국 유치장에 수감되어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코에 고춧물을 붓고 가죽 채찍으로 난타질을 당하였다. 대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고 인두로 지지는 갖은 고문을 받았다. 물을 잔뜩 먹인 다음 부풀어 오른 배 위에 경관이 올라서서 발을 굴렀다. 그러면 9구멍에서물이 솟구치는 고문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당하기도 했다. 이때 고문으로 위장을 상한 손정도는 평생 고통을 받았으며 일찍 세상을 버리는 원인이 되었다. 두 팔을 뒤로 젖혀 몽둥이로 깍지 끼워 엄지손가락에 밧줄을 메어 공중에 매다는 비행기 고문도 있었다.

여러 혐의를 씌워 갖은 고문을 했으나, 아니불(不)자 하나만 말할 뿐 신앙으로 버티는 손정도를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자 일제는 1년간 거주제한을 하여 전남 진도로 유배 보냈다.

다행히 진도의 1년 유배는 손정도에게 고문으로 상한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기도와 묵상으로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함께 진도로 유배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구상도 다듬었다. 또한 제자들을 길러내었으며 진도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제2의 도약을 위한 축적의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