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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은 여느 때보다 간단했다. 청송군 주왕산과 영양군 주실마을, 이 두 곳에 발 도장을 찍으면 됐다. 시인 조지훈(1920∼1968)을 조금 더 생각하게 됐다. 자연스레 ‘시인도 주왕산에서 시감(詩感)을 얻었겠지’란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것 같이 주왕산과 시인 조지훈을 공통으로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청(靑)이다. 그렇다면 ‘청(靑)’이란 무엇인가. 푸른색과 더불어 젊음, 봄, 동쪽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에게 ‘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다. 일제강점기에 등단한 조지훈은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무엇보다 ‘지조론’을 통해 절개와 지조를 논했다. 그야말로 푸른 소나무 같은 삶을 살아간 이가 조지훈이다.
 
주왕산은 청송군에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청송군의 뜻도 ‘푸른 소나무(靑松)’다. 소나무가 많아 청송인가 했더니 역시나 주왕산에서 눈을 두는 곳마다 소나무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소나무 천국이긴 하지만 최근 잘 보지 못한 점을 생각했을 때 겨울 주왕산에서 만난 소나무들이 정겹고 반갑다.

만물이 쉬는 겨울에도 소나무의 푸른 기운이 산 전체를 덮는다.
 
경상북도 BYC(봉화, 영양, 청송)로 유명한 청송과 영양은 경상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졌다. 그만큼 사람의 손때가 타질 않아 청정고장으로 유명하다. 경북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두 고장 모두 산이 많다. 영양의 북쪽에는일월산(1218m)이 솟아올라 그 아래로 봉우리들을 만들고 있다. 청송 역시 주왕산을 둘러싼 900m 내외의 산들이 있다.
 

주왕을 기억하는 산
 
먼저 청송군 부동면에 위치한 주왕산이다. 산은 해발 721m이며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3대 돌산(바위산)으로 유명하다. 태백산맥 남쪽에 위치하며 600m가 넘는 봉 12개가 주왕산과 어울린다. 1976년 국립공원, 2003년 명승 제11호로 지정됐다. 산은 화산폭발로 만들어졌다.

폭발 당시 생긴 돌 부스러기들이 쌓여 굳은 응회암 지대가 비바람을 맞고 견디며 만들어진 자연의 작품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산들이 병풍과 같다고 해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한다. 계곡 일원에는 연꽃 모양의 연화봉, 떡을 찌는 시루 모양의 시루봉 등이 눈에 띈다.
 
지난달 20일, 눈(雪)이 쌓인 터라 정상은 눈(目)에 담고 폭포 주변을 거닐었다. 우뚝 솟은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만 수만 년 또는 수천 년간 비바람을 맞이한 바위들이 부드러우면서도 장중하다는 게 느껴진다. 평소엔 암벽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지만, 겨울인 탓에 밑으로 내리다 꽁꽁 언, 그래서 공중부양한 얼음을 볼 수 있다.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질 때까지는 물이 아닌 얼음이다.
 
왜 주왕산인가. 중국 당나라 때의 일이다. 주도(周鍍)가 ‘주(周)나라를 다시 일으켜 왕이 되겠다(後周天王)’고 하여 당나라의 도읍지 장안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패배한 주도는 신라에까지 들어오게 됐다. 주왕(周王)이 되어 보겠다고 한 그는 신라땅을 밟고 이름 모를 산에서 기거하다가 당의 요청으로 정벌에 나선 신라 마 장군의 화살에 쓰러졌다. 주왕(편의상 주왕이라고 하겠다)이 깃발을 꽂았다는 기암(期巖), 그가 군사를 숨겨뒀다는 무장굴, 그가 최후를 맞은 주왕굴 등이 주왕을 기억하고 있다.
 
주왕의 최후는 ‘덧없는 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주왕은 굴(주왕굴)에 숨어 살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하다가 마 장군이 쏜 화살과 철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주왕의 후주천왕(後周天王)은 한낱 꿈으로 날아갔지만  주나라 초기의 옛 명성을 다시 돌리고 싶은 염원은 이국의 산에 고스란히 남았다.

주왕산 곳곳에서 소나무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쉽게 찾아볼 수있다. 아니 그보다 소나무의 푸름이 겨울 주왕산에서 단연 돋보인다. 특히 한국인은 소나무와 일생을 함께한다는 문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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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을 알리는 것이 금줄이며, 금줄에 거는 것이 소나무 가지다. 금줄의 금(禁)이 ‘금하다’라는 뜻을 가졌듯 잡스럽고 삿된 기운을 막는 힘이 소나무에 있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소나무의 푸른빛은 생명의 상징이니 갓 태어난 생명에게 소나무는 의미가 매우 크다. 딸이면 오동나무를, 아들이면 소나무를 심는데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을 해보내고, 아들이 장가들 때 관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묻힌 묘 주변에는 소나무들을 둘러 심었다. 집 또한 소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소나무 근처에서 퇴비를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이있다. 소나무엔 항균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송편을만들 때 시루 밑바닥에 솔잎을 깔아 놓는데 송편은 솔향을 머금기도 하지만 항균 처리된 먹을거리가 된다. 우리는 예부터 소나무에 인격과 신성을 부여했다. 민간과 도교에선 소나무는 영원불멸을 상징하고, 장엄하고 장대한 노송은 하늘의 신이 땅에 내려올 때 이용하는, 하늘과 땅을 서로 이어주는 영물로 여겼다. 그리고 매섭게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아 기개 있는 군자와 선비의 덕을 나타냈다. 그래서 소나무와 관련된 시조와 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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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바르면 말이 바르다.
말이 바르면 행동이 바르다.
매운바람 찬 눈에도 거침이 없다.
늙어 한갓 장작이 될 때까지
잃지 않는 푸르름.
영혼이 젊기에 그는 늘 청춘이다.
오늘도 가슴 설레며
산등성에 그는 있다.

                                 - 유자효‘소나무’전문 -

 
 
 
주왕산의 자랑거리엔 기암(奇巖), 소나무와 더불어 깊은 계곡이 있다. 암봉들을 한 차례 구경하고 나면 그 끝나는 곳에 제1폭포를 시작으로 제2폭포와 제3폭포가 등산객을 맞이한다.

겨울이라 공중부양을 한 얼음이 반겨주었지만 그래도좋다.

전국에서도 오지라고 알려진 청송. 그래서 다행이다. 찾는 이가 드물어 제 색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의 푸른빛을 마음에 담고 푸른빛을 띠는 한 시인을 만나러 영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양 주실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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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문향을 피우다
 
청송에서 차로 약 1시간을 달리면 영양이 나온다. 영양은 ‘문향의 고장’으로 통한다. 그런 만큼 근·현대 문학사에 발자취를 남긴 문인이 많이 출생한 곳이다.
 
영양 주민들 스스로가 ‘자연과 문학이 함께 어우러진 고장’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서정시인 오일도에서부터 청록파 시인 조지훈, 현대 소설가 이문열, 최근에는 정재숙과 황명자, 강용준 등에 이르기까지 결코 적지 않은 문학인들이 영양 출신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일도의 감천마을, 조지훈의 주실마을, 이문열의 두들마을 등이 지역 문학인들의 출생지와 지역 문화재를 엮어 만든 문학마을이 곳곳에 있다.

지난달 21일, 주실마을의 겨울 아침은 차분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가지를 하늘로 치켜 벌린 나무 한 그루가 주실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마을은 조선 중기 때 환난을 피해 온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다. 시인 조지훈도 한양 조씨로 이 마을에서나고 자랐다.
 
한양 조씨가 오지로 내려온 배경엔 기묘사화가 있다. 중종 14년(1519) 훈구파는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를 경계하면서 급기야 숙청했다.
조광조의 친족인 호은공 조전은 한양을 떠났고 1629~1630년 사이 가족들과 함께 지금의 영양 주실마을에 정착했다.
 
마을 한복판엔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경상북도 기념물 제178호)이 있다.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저택인 ‘ㅁ’자형이다. 호은종택 대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붓 모양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 이 봉우리는 문필봉으로 불린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봤을 때 문필봉이 있는 곳에 문인, 학자가 배출된다는 이야기가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조지훈 역시 이러한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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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뿐만이 아니다. 조지훈의 가족력을 보면 그가 왜 곧게 살 수 밖에 없었는지 단번에 알게 된다. 조부인 조인석(1879~1950)은 6·25 당시 인민군에 항거하다가 자결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구한말 의병장 남주 조승기가 있다. 이처럼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선인들은 자연스레 어린 동탁(조지훈의 본명)의 마음과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이 즈음해서 조지훈이 국문학적으로 어떠한 위치였는지, 어떻게 지조론을 쓰게 됐는지 한번 짚고 가보자. ‘시인 조지훈’을 던져놓으면 곧 ‘청록파’ ‘승무’가 따라온다. 그렇다. 앞서 말한 것 같이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유명하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익숙한 ‘승무’를 작시(作詩)했다.

청록파 가운데서도 그는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인물이며,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리고 ‘지조론’에서 볼 수 있듯 당대의 논객이요, 한국민족운동사와 한국문화사서설 등 한국학 연구에 있어서도 큰 획을 그은 학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지조론>이 눈에 들어온다. 골자는 ‘선비이고 지식인이고 지도자라면 지조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여진 수필은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정치계를 쥐락펴락하는 당대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글이다.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지조는 역사의 객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해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이를 초지일관 밀고 나가는 것이다.
 
만약 삶의 기준과 가치관을 바꾸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좋은 방향일 때에 도리어 지조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지훈은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면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며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변절은 무엇인가. 단순히 가치관이나 노선을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해 옳은 신념을 버린 경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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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과 관련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이자, 그리고 사람들은 조지훈을 숨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죽음을 관조한, 그래서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은 인물로 기억한다. 조지훈은 멋을 중요하게 여긴 동시에 신념역시 매우 강조했다. 그에게 멋은 곧 신념이다.

어쩌면 조지훈이 승무, 무고 등 우리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리네 참다운 미학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것을 지키겠다는 욕심은 일찍이 그 아름다움을 찾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부터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것을 지켜왔기에 그 저항과 신념의 유전자가 조지훈의 정신과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은 아닐까.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승무’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