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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성보다 뛰어났던 신중함
 
‘열흘  마다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꼬아서 끈을 만들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 표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정신이 산뜻해졌다.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었다..“이 편지가 큰 길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열어 보아도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없기를” 또 이렇게 빌었다. “이 편지가 수백년을 전해 내려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공개되어도 나를 조롱하는 일이 없기를” 그런 다음에야 봉투를 붙였다. 이것이 군자의 신중함이다. 나는 젊어서 글씨를 빨리 쓰다 보니 이런 경계를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중년(中年)에는 재앙이 두려워 점차 이 방법을 지켰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 하나다. 그는 편지나 일기 같이 지극히 사적인 글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사사로움은 절제했다.
세상모르게 쓰는 글이 일기요, 받는 이만 알게 하는 게 편지라면 욕지거리 꽤나 소상하게 퍼부어도 될법한 공간인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기록으로 남겨지는 글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1801년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황사영백서사건’이 그 일이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이복 맏형 정약현의 사위로 천주교신자였고, 신유박해(1801년 천주교도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사건, 이때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처형되고 둘째형 정약전과 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전말 보고와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해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에 보내려다가 조정에 적발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선정부는 천주교가 인륜을 어길 뿐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는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더욱 탄압했으며 신유박해 때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약전과 약용은 다시 서울로 압송돼 혹독한 국문(鞫問)을 당했다. 황사영백서사건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 없었지만 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됐다. 정조가 죽고 난 조정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화했던 노론벽파의 천하가 되어 그들의 정적이자 남인의 핵이었던 정약용을 제거할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그렇게 나이 마흔에 바닷가 강진까지 내몰리게 된다. 한때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전도양양했던 그였다.
스물여덟 살에 대과 장원으로 급제한 약용은 재능뿐 아니라 정조의 오래된 슬픔,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아는 신하였다.
정조는 약용에게 수원화성을 설계하라는 명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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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열한 살에 잃어버린 아버지 사도세자를 가까이 모시려는 계획이자, 끊임없이 왕과 개혁정치를 흔드는 한양을 떠나 토지제도를 개선하고 상업도시를 형성해 이상 정치를 펼치기 위한 꿈의 상징이었다. 약용은 이 엄청난 과업을 정조의 기대에 넘치도록 이뤄냈다. 과학적인 설계도와 기구 제작, 공사 실명제를 시행하고 정당한 임금 지불로 부역인부들의 사기를 높여 축조 경비를 절감했다.
 
또 10년 안팎으로 예상했던 공사기간은 3년으로 단축됐다. 성공적인 화성 설계 이후에도 암행어사, 병조참의, 정3품우·좌부승지 등을 거치며 이뤄낸 그의 업적과 천재성을 나열하고자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1800년 봄,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다. 그를 헐뜯는 노론의 상소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리당략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짓는데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유’는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처신하라는 뜻이다. 몸을 낮추고 조심히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늘은 조용히 살고자했던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낙향 몇달 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순조가 즉위하자, 남인 출신이 많았던 천주교도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형 정약종, 형수 문화 유씨, 매형 이승훈, 조카 정철상·정정혜, 조카사위 사영이 한꺼번에 몰살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돌아올 기약 없는 머나먼 귀양길에 오르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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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를 좇는 일, 선비와 스님의 길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역병에 걸린 환자를 보듯 피했다.’ 강진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부모도, 나라 임금도 몰라보는 천주학쟁이’ 혐의를 받은 죄인에게 따뜻한 눈길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특히나 그를 밀착 감시하기 위해 강진현감으로 노론벽파의 골수 이안묵이 부임했을 정도인데 말이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 것. 강진읍 동문 앞에서 음식과 술을 팔던 주막 ‘동문매반가’의 주모 할머니가 좁은 골방 한 자락을 내주었다. 이곳이 낯설고 물 설은 강진에서 정약용이 처음 몸을 의지한 곳 ‘사의재’이다. 사의재란 ‘마땅히 해야 할의로운 네 가지’로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빨리 맑게 하고, 용모는 마땅히 장엄해야하니 장엄하지 않으면 빨리 단정히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행동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빨리 더디게 하라’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정약용은 이 주막 한 칸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산석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한날은 산석이 자신의 둔함을 자책하자 약용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공부하는 자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총명하여 외우기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글을 빨리 짓는 것은 그 폐단이 부실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깨달음이 빠르면 그 폐단은 거칠어지는 것이다. 무릇 둔하면서 파고드는 자는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소통이 되면 그 흐름이 툭 트이게 되며, 미욱한 것을 계속 닦아 내면 그 빛이 윤택해지는법이다. 파고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함이다. 소통시키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함이다. 닦아내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역시 부지런함이다. 이 부지런함을 어떻게 다 할 수 있겠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엔 주역(周易)에 몰두했다. 4년쯤 지나자 귀양살이가 다소 완화돼 인근 산책이 가능해질 무렵이었다. 갇혀 지내던 생활에서 자유를 얻은 정약용에게 하루는 노인이 찾아와 만덕산 백련사 주지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백련사에는 서른네 살의 혜장선사가 주지로 있었다. 혜장은 정약용보다 나이가 열 살 어렸고 승려였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에도 뛰어났다. 정약용은 어느 봄날 백련사를 찾았다. 주지 혜장은 만경루에서 다산을 맞았고 둘은 주역을 놓고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이어갔다. 혜장은 역(易)에 관심이 깊어지던 터에 스승을 만난 듯했고, 정약용은 혜장으로 인해 차와 불교에 심취하는 계기가 됐다.
 
정약용은 특히 차의 세계에 있어서만큼은 혜장을 임금처럼 여겼다. 혜장은 우리나라 차문화를 적립한 초의선사를 다산에게 소개해준 주인공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만덕산에서 딴 찻잎을 발효시켜 만든 떡차를 마치며 수시로 학문을 논했는데 혜장이 정약용에게 보낸 시를 보면 얼마나 서로를 아끼고 존경했는지 짐작할 만한다.
 
은근한 말씨 속에 깊은 의미 담겨 / 두려운 마음으로 잘못을 고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 ‘주역’의 상에 뛰어난 안목 있고
/ 날카로운 필봉은 졸음을 몰아낸다 / 우연찮은 해후에 갖은 시름 다 잊다가 / 헤어지면 마음 아파 그저 생각뿐인데 / 때마침 들녘 절간 찾아 / 껄껄대는 웃음 속에 불법을 묻는다
 
정약용은 혜장의 성품이 의외로 급한 것을 알고, 노자의 가르침 중 ‘부드럽기를 어린아이 같이 하라’는 말을 인용해 아암(兒庵)이란 아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다산이 해배되기까지 10년 간 지냈던 다산초당 옆 동암 뒤에는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 있다.
그 길은 선비(유)와 스님(불), 숨통 막히는 유배지와 자유를 주는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했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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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오명 벗을 때까지
 
다산 정약용.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유배기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조선의 천재. 18세기 인물의 사상과 업적이 21세 기인 오늘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헌데 그 위대한 인물이 가장 오래 머물었던 유배지 전남 강진에선 그를 포장하고 있는 수많은 말들보다 유배객의 초조함, 외로움과 고독함이 짙게 묻어있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또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 머리말은 언제나 그리움과 걱정 근심어린 내용들로 시작된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그리워했고,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는 제자에게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배 초년엔 세상살이를 덧없어 하며 이불개기를 게을리한 날도 있었다.

승승장구했던 시절을 잊지 못해 강진의 월출산을 오르면서도 한양의 도봉산을 떠올렸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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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령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樓犁嶺上石漸漸)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다 (長得行人淚灑沾)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마소 (莫向月南瞻月出)
봉우리들이 어찌 저리 한양 도봉 같은고 (峰峰都似道峯尖)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뜻을 세워 저술활동을 펼칠 때는 어깨에 마비가 올 정도로 몰입했다. 사실 그는 죄인의 오명을 벗어 던지고 싶었고, 그 소원은 너무나 절박했다. 당대는 물론 후세사람 들에게 조차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다는 절박함. 이런 절박함 속에서 다산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500여 권의 책을 남기게 됐던 것이다.
 
최근 출간된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에선 ‘세상은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 발전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같은 맥락이다.

최고의 석학이자 임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충신이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몰려 받았던 상처와 좌절, 시련은 그를 위축시키기도 했지만 결국엔 당대 실세 노론벽파보다 더 열심히 유배지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되어줬다. 그리고 100년, 200년이 지나서도 그의 이름과 학문, 업적은 그가 기대했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회자되며 평가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 〈이야기로 만나는 다산 정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