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민족대표 이야기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동아일보 1920년 7월 2일자).
극단적인 식민지 무단통치하의 완전무장해제 당한 상태에서 민족대표들이 취한 비폭력 운동 방법론은 불가피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3·1운동 지도자들이 민중에게 폭력방법을 요청했더라면 3·1운동은 200여 만 명이 참가한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파고다공원과 기타 요소에 일본군 몇 개 중대나 대대만 투입해도 진압되어 버리는 정예분자의 소폭동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태화관 별관 별유천지(외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각이 있다. “33인이 삼·일운동을 계획한 것은 우리민족운동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민족대표들은 운동지도 책임을 저버리고 투항하였으며, 비폭력 노선을 채택함으로서 운동을 실패하게 했으므로 민족대표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전자는 운동의 동기와 발발, 그 영향에 주목한다. 이에 비해 후자는 운동의 진행과정과 결과에 주목한다. 후자의 실패론은 결과적으로 독립을 달성하지 못했고, 그실패의 책임은 민족대표들에 있다고 한다.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을 놓고 벌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논쟁은 마치 장미를 놓고 “가시에도 불구하고 역시 장미”라고 하거나 “가시 때문에 장미…”이라고 하며 부정하는 논쟁과 같다. “모든 혁명은 썩은 문짝을 차 넘어뜨리는 것이다”고 한 갈브레이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3·1운동은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당시 한국민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 체제는 결코 “썩은 문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 주권을 빼앗은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일본 육군 대장과 헌병경찰제를 기초로 입법·사법·행정 및 군사의 전권을 행사하며 강고한 식민지 지배 정책을 집행하였다. 모든 결사와 집회, 언론 출판의 자유는 철저하게 억압 감시당하였다. 일제는 1914년 전면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과 1917년 면제 시행으로 지방사회을 장악했으며, 토지조사사업의 완성, 일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통하여 식민지적 침탈과 함께 지역사회의 향촌공동체적 결속력을 해체해 갔다. 한국의 시장과 무역은 일인과 일본에 의해 독점되고, 한국은 쌀을 비롯한 일본의 원자재 공급지, 직물을 비롯한 일본 공업제품의 소비지로 전락하였다. 식민지 노예교육을 시행하고, 일본의 통치에 저항할 경우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
덕수궁 앞 만세시위 군중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그 시점의 일본은 전승국의 일원으로, 국제적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경제적으로는 대전특수 경기로 말미암아 만성적 적자국에서 흑자국으로 도약하였다. 이에 반하여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10여 년 이상 국내 대중들과 분리되어 있었으며, 국내 대중들과 연결하고자 한 시도들과 국내의 항일 비밀결사체들은 대부분 3·1운동 전에 발각되거나 차단당하였다. 3·1운동은 이런 조건 속에서 일어났다. 3·1운동이 독립이라는 결과를 얻어야 의의가 있다면, 이전의 애국계몽운동, 의병운동이나 이후의 모든 독립운동 또는 민족운동도 그런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이렇게 보면 민족대표는 3·1운동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강고한 일제 제국주의 치하의 저항을 꿈꿀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해 낸 지도자들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민족대표의 비폭력 노선에 대해서도 이해가 필요하다. 극단적인 식민지 무단통치하의 완전무장해제 당한 상태에서 민족대표들이 취한 비폭력운동 방법론은 불가피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3·1운동 지도자들이 민중에게 폭력방법을 요청했더라면 3·1운동은 200여 만 명이 참가한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파고다공원과 기타 요소에 일본군 몇 개 중대나 대대만 투입해도 진압되어 버리는 정예분자의 소폭동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예가 1907년 8월 1일 구한국 군대 해산을 발표했을 때 있었다. 군대해산에 불복한 시위대 군인들이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무장 봉기하여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진압 앞에 얼마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1919 민족대표 독립선언 장소인 태화관의 별관 별유천지 입구
태화관 별유천지 독립선언 현장(내부)
거의 모든 권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대적 권력표출을 유발한다. 고용주의 권력에 대해 노동조합, 노동조합에 대해 노동법 등과 같이 조직을 형성하여 저항한다. 이러한 대칭성은 조직에는 조직, 재산에는 재산, 조종에는 조종 등으로 권력의 근원과 행사수단들 사이에까지 연장된다.
이러한 것을 ‘대응력(countervailing power)’이라 한다. 지배와 저항 사이에도 이러한 대칭 평형이 형성된다. 강력한 무단통치에 대해서는 강력한 무장투쟁으로, 강력한 군사독재에 대하여는 강력한 민주화 투쟁과 같은 형태이다. 그런데 역사상에서 갈브레이드가 ‘비대칭적 대응’이라고 이름 한 특이한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한국의 3·1운동, 마하트마 간디의 대영 비폭력 무저항운동,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 성공이 그런 경우였다. 이들 대중운동은 비폭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폭력적 권력구조의 대응을 마비시키고 혼란시켰다. 3·1운동에서 그런 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 1919년 4월 3일 조선헌병사령관이 본국에 보낸 다음과 같은 전문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제야 말로 군대도 이미 121개소로 분산하여 진정에 힘쓰고 있으나 원래 무장 또는 한정된 결사단체의 기도가 아니고 주민 전부의 반항이므로 이에 대하여는 유감이나마 단연한 처치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있다.”(1919. 4. 3. 오후 11시 39분발, 조선헌병대사령관전보,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1, p. 90)
3·1운동 민족대표의 비폭력 방침은 대립되는 일제 지배권력을 마비시켜 운동을 대중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직(성신여대) 교수는 <현대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과 민족적 사회운동: 비교역사학적 관점에서 본 3·1운동(1919)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1992)>이란 논문에서 3·1운동의 성격과 의미를 다른 차원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3·1운동은 보는 입장에 따라 ‘민족적 독립운동(민족주의자)’ ‘급진적 대중폭동(식민주의자)’ ‘부르주아 민족운동(제1세대 마르크시스트 역사가)’ ‘급진 종교운동(종교지도자)’ ‘민족적 민중운동(민중사학자)’ ‘민족해방운동’ 또는 ‘반제국주의 투쟁(제2세대 마르크시스트 사학자)’으로 각각 달리 보는데, 그는 어느 정의도 3·1운동을 포괄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 운동은 혁명적 무장투쟁도 아니고, 충분히 발현된 사회주의적 성향의 해방운동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피압박 민족의 비이성적인 폭동도 아니고, 급진적인 민중봉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운동은 일단의 부르주아지들과 종교적 지식인들이 조심스럽게 계획한 운동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순수한 부르주아 또는 종교운동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운동의 주력은 농민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운동을 특징짓는 다음과 같은 것에 주목하였다.

파고다공원 옆 종로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
1) 운동지도부는 대규모 군중 동원이라는 ‘사회적’ 측면의 문제를 위해 혁명운동과 같은 조직적 투쟁을 계획하지 않고 비폭력 시위운동으로 계획하였다.
2) 운동의 초기에는 사회개혁운동 형태의 집단행동으로 시작하였다.
3) 운동이 진행되면서 대중투쟁이 혁명운동의 양상을 띠어 갔다.
4) 운동은 다양한 보통사람들의 참여로 운동이 강화되어 급진되었다.
5) 민족해방의 전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은 비합법적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은 것은 운동의 시초에 제한된 전망과 제한된 목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6) 그러나 대중의 성공적인 동원이 이 운동방식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7) 지배권력은 강경진압으로 대응하면서도 그들의 지배정책을 획기적으로 변경한다. 이 변화된 조건이 다음 단계의 대중운동으로 이끈다.
그는 이런 양상의 운동이 1919년 한국, 중국, 인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하여 사회개혁 성격의 집단행동으로 출발, 격렬한 대중투쟁의 혁명운동 형태로 귀결되는 이런 유형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적 사회운동(National Social Movement)’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민족대표의 선도에 호응하여 대중들이 이에 전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새로운 종교(기독교, 천도교) 지도자들과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이 민족적 사회운동, 즉 근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더 큰 동기를 선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3·1운동이 대대적인 혁명운동으로는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1919년 당시의 일제 국가구조가 강고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위 책, pp.206~207).
필사 독립선언서가 소장되어 있는 콜롬비아대학 버틀러 중앙도서관
이와 같은 견해는 3·1운동에 대해 기존의 성공이냐 실패냐의 이분법적 이해에서 벗어나 3·1운동의 성격에 대해 확대된 관점과 선명한 전체상을 갖게 도움을 준다. 이와 같이 3·1운동을 다른 모습으로 성격을 규정할 수 있게 되면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도 자연히 달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민족대표는 3·1운동 실패의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을 꿈꿀 수 없는 강고한 일제 제국주의 치하라는 악조건 속에서 ‘민족적 사회운동(National Social Movement)’을 성공적으로 조직해 낸 지도자로 평가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미국 뉴욕의 콜롬비아대학 도서관 4층의 귀중자료실에서 <김용중 자료>를 보던 중 미주에서 태극기 두 개를 교차시킨 아래에 펜으로 필사한 <3·1독립선언서>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 조그만 부전지 하나가 붙어있었는데 이렇게 씌어 있었다.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의 뜻을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활자로는 원문(국한문: 필자) 그대로 인쇄할 수 없어 필사로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독립선언서의 원문 그대로 인쇄할 수 있는 활자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손글씨로 원문 그대로 베껴 쓴다는 것이다. 해외 동포사회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민족대표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였던가를 보여주는 자료라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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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 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