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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역사

“물이로소이다”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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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 얼마나 어리숙하면 속아 넘어갈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과연 돈을 주고 물을 사 먹는 날이 올까 싶은 이야기는 이미 현실이 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물을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지금이야 마트나 편의점 등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생수이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수기를 사용하는 집이나 생수를 먹는 집은 소위 ‘잘 사는’ 집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생수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물을 돈 주고 사 먹게 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몸에 좋고 맛도 좋고
물을 논하는 자리니, 물에 관련된 간단한 질문 하나 던지고 시작해보자. 깊은 산속에 있는 옹달샘은 과연 누가 와서 먹을까. 동요에 보면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것을 보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래도 토끼 같다. 토끼도 깊은 산속 옹달샘의 ‘물맛’은 알았나보다.

우스갯소리처럼 시작했지만 사실 돈을 주고라도 ‘물’을 사 먹게 된 이유는 ‘물맛’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다시 말해 물을 사 먹게된 데는 ‘좋은 물’과 ‘생명 유지’에 대한 본능이 작용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몸에 좋은 물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 유명한 약수터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온천수에 몸을 푹 담그기도 한다. 결국 물에 상품 가치를 부여한 것은 좋은 물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샘물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치료용으로 사용한 샘물들은 대부분 운송료만 지불하면 얻을 수 있었지만 수요가 많아지면서 소유주들은 물에 값을 부여했고, 그렇게 항아리나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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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물장수는 아침, 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1910년대 서울 시내의 우물 수는 총 1만 1410개였지만 이 중 9911개가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했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장수에 의존수할밖 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특히 수질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정동제일교회에 있던 우물도 그중 하나)은 인기가 좋았는데, 수질이 좋은 곳의 물 주은로 부유층들이 거래했다. (제공: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처음으로 판매에 적합한 상태를 갖춘 물을 상품화한 곳은 프랑스의 에비앙(Evian,1829)이다. 1824년 온천으로 시작해 2년 후에는 에비앙의 판매를 시작했으며, 1829년에는 생수를 팔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다. 초기 도자기에 담아 판매하던 전통을 살려 무려 91년 동안 도자기에 생수를 담아 판매했으며, 1920년부터 유리병에 생수를 담아 판매하고 있다.

북청물장수의 등장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물을 판매하게 됐을까. 사실 ‘물’이라는 것만 따지고 보면 그 역사는 꽤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그 이름 ‘북청물장수’의 등장은 ‘물’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청물장수’는 조선 철종 때 함경남도 북청에 살던 사람이 한성(서울)에 올라와서 물장수를 시작한 데서 유래됐다. 이후 고종 때 역시 함경남도 북청에 살던 김서근이라는 사람이 과거를 보러 한성에 왔다가 삼청동에 있는 약수터 물을 나눠주면서 조직적인 물장수를 시작하며 ‘수도방가’를 차리게 된다.

‘북청물장수’의 조직적인 등장은 믿고 먹을 수 있을 만한 ‘깨끗한’ 물을 찾는 이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았다.

당시 한국은 근대적 상수도 시설이 전무했던 터라 오염되지 않은 물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니 깨끗한 약수를 배달해주는 북청물장수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었다. 무거운 물통을 양쪽에 지고 다니는 것이 고된 일이긴 하지만 수입은 상당해 당시 인기 있는 직업이었지만, 1908년 서울에 상수도가 준공되면서 1914년 북청물장수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파인(巴人) 김동환은 그의 시 <북청 물장수>에서 억척스럽고 부지런했던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기도 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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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은 되고, 내국인은 안 돼
우리나라에서 생수가 처음 상품으로 나온것은 생각보다 오래전인 1912년이다. 당시 충청도 초정리 약수터를 개발해 ‘구리스타루’라는 상표로 천연사이다와 천연탄산수를 출시한 것이 그 시초이지만,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것이기에 차치하기로 한다.

이후 1970년 생수의 수입 판매가 형성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지됐으며, 1975년 9월부터 생수 개발을 시작했지만 생산 전량을 수출하거나 주한 외국인에게만 판매할 수 있었다. 1976년 ‘다이아몬드 정수’가 국내 최초로 생수 제조 허가를 받았지만 이마저도 미군 부대 납품용이었다. 그러다가 1988년 88서울올림픽 기간 동안 생수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또한 외국인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당시 외국 선수들이 국내 수돗물의 안전성을 의심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임시적인 조치였다. 올림픽이 끝난 뒤 근거 법률을 폐지하면서 생수 국내 판매가 다시금 금지됐는데 이는 생수 시판이 사회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으며, 자칫 ‘수돗물 정책의 포기’로 보여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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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생수업자들은 끊임없이 생수 판매 허용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그 결과 “생수 판매 금지 조처는 깨끗한 물을 마실 권리(행복추구원)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1994년 3월 16일 국내에서 생수 시판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게 된다.

당시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는 발표문을 통해 현재 전량 수출 및 주한 외국인 판매를 조건으로 생수 제조 허가를 받은 14개 업체는 허가 당시의 제조 시설 및 수질 기준 적합 여부를 확인받는 대로 시판할 수 있도록 했다. 무허가 또는 신규업체는 상반기 중 새로 마련될 시설 및 수질 기준에 따라 새로 허가를 내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생수의 대중 광고를 금지했으며, 제품 이름도 생수, 약수, 이온수, 생명수 등은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광천음료수’라는 이름으로 명기토록 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1995년 ‘먹는 물 관리법’이 제정되면서 같은 해 5월 ‘먹는 샘물’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유통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국내에서 생수가 판매되기 시작한 역사는 짧지만 생수 시장은 2000년대 이후 매년 12% 가량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20년에는 편의점, 마트, 기타 카페 등에서 구매하는 생수 소매시장 규모를 1조 원까지 내다 보기도 했다. 비록 10여 개 브랜드가 상위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현재 국내 생수 브랜드는 약 300개에 이른다.

‘물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람들은 물맛의 미묘한 차이에도 각자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을 정도다. 어쩌면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물’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