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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의 역사 (6)

- 다문화 국가 미국의 다문화 흑 역사


글.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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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인류 역사상 로마와 당나라 같이 문명의 꽃을 피운 다문화 국가들이 많지만 그 어떤 다문화 국가도 미국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로마와 당나라 등은 초기 자신들 종족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다가 점차 강성해지면서 ‘포용적인 다문화 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다양한 이민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륙회의라는 것을 거쳐 아메리카합중국으로 출발했다. 미국의 이주민들은 다양한 경로를 거쳐 아메리카로 건너왔다. 최초아메리카대륙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인디언들이다.

인디언들이 아메리카대륙에 정착하게 된 과정에 대해선 세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빙하기에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베링해협이 육교로 이어져서 몽골로이드가 넘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남아시아 쪽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왔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 쪽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설이 있다.

그중 빙하기로 바다 수면이 낮아져 베링해협이 육교로 이어졌던 BC1만 년 전부터 2000~3000년경까지 집중적으로 넘어왔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체적 특징 중에 몽골반점이 나타난다는 점, 수염이 별로 나지 않는 점 그리고 마른 귀지를 갖고 있는 점이 몽골로이드와 닮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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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 혼타스. 점령군인 영국 장교와 인디언 추장 딸의 사랑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
 


이와 달리 유럽의 백인 계통은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바이킹족에 의해 그린란드와 캐나다, 미국 북동부지역이 개척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 바이킹족의 초기 정착지에서는 아메리카 인디언 간의 전쟁이 진행되었던 역사적 유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착하지 못했고,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된 후 본격적인 이주민들이 발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후 뉴잉글랜드 등을 중심으로 영국계 이민자들이 많은 인구를 차지했다. 영국 이민자들은 초기에는 가톨릭계가 많았지만 종교개혁운동 이후에는 ‘청교도’들이 대거 이주하였다.

그 외에 루이지에나 등지에는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많았고, 뉴욕과 뉴저지에는 네덜란드인이, 델라웨어에는 스웨덴출신이, 플로리다에는 스페인 출신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 성장하게 된 과정은 국제관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최초의 국제 전쟁인 7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전후 부담금을 충당하려는 영국에 반발해 ‘보스턴 차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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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종 국가로 구성된 미국에서 최근에는 메스티조와 같은 미국 혼혈이라는 새로운 인종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영국과 전쟁에서 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독립운동 세력 편을 들면서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독립을 쟁취하게 된 것이다. 독립 후 유럽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고, 전쟁재정을 충당하려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에나 등을 인수하면서 영토가 확장되어 실질적인 국가로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은 독립전쟁과 국가의 성립과정 자체가 다민족, 다국적 무대를 통해 탄생하고 성장한 나라였다. 그러나 성장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다문화 국가로 출발했음에도 이민자나 다문화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미국이 다문화 국가로 출발했지만 주류인 백인 이민자들, 심지어 백인 이민자들 사이에서 조차 끊임없는 차별과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갈 즈음에 1300만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발견된 미시시피 문화는 물론, 세인트루이스 지역에는 1만 명 이상이 거주한 대유적지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꾸어온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학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즉 땅에 대한 소유권, 매매에 대해 경험이 없는 인디언을 대상으로 인수계약을 맺고, 그 다음에는 인디언들을 보호구역 내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해나갔다. 특히 13개주를 장악한 뒤 서부개척시대에는 유럽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이주민과 몰몬교도가 중심이 되어 중서부 인디언들을 대거 학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세 차례에 걸친 학살전쟁에서 300만에 달하는 인디언이 학살당하였다. 또한 인디언들의 주요 식량원인 버팔로를 멸종시킴으로써 인디언 인구를 줄여나가는 정책을 펼쳤다(그 과정에서 4000만 마리 이상의 버팔로가 1만 마리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질다인종 국가로 구성된 미국에서 최근에는 메스티조와 같은 미국 혼혈이라는 새로운 인종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병에 인디언들의 취약한 면역력도 주요 원인 중의 하나였다.

흑인 노예 문제도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카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동력 필요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끌어들인 흑인 노예들은 남부지역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다. 그러다가 북부공장지대의 산업자본에서 노동자가 더 필요하게 되어 노예해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남북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으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지만 유럽산업자본의 지원을 받는 연방군이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인권적 의미에서 이뤄진 노예해방이 아니고, 산업인력 수급의 필요성에 따라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노예해방이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부 주에서는 노예에 대한 즉결 처형이 이뤄지는 등 노예해방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차 대전이 끝난 1930년대에 참정권을 갖게 되었지만, 흑인들은 그보다 훨씬 뒤인 2차 대선이 끝나고서야 참정권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 식당과 교통수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린치를 당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아시아로부터 이주민이 밀려들어왔다. 또 1900년대 후반에는 중남미에서 히스패닉계 이주민이 남부와 서부 쪽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선 인도계와 중동의 이슬람 세력의 이주민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그래서 지금 미국은 ‘지구촌 인종 전시장’이라고 지칭된다. 뉴욕의 맨해튼에서는 “한 시간 동안 100가지 언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표적인 다문화지역’이다.

이렇듯 미국의 다문화 역사는 로마나 당나라와는 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다. 로마나 당나라가 중심 종족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다문화 포용력’을 발휘해 나갔다면, 미국은 다문화 국가로 출발했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주민과 다문화를 저지하고 반대하다가 어쩔 수 없이 포용하는 형태가 반복되었다.

학살과 추방을 하다가 포용하고(인디언), 차별과 배척을 하다가 수용하고(흑인), 배제하고 저지하다가 용인하고(아시아계와 인도계), 저지하고 투쟁하다가 공존하는 과정(이슬람계)이 이어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만의 독특한 특징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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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첫 번째가 이민자 사회통합중심의 ‘용광로 정책’이다. 즉 출신이 어떠하든 문화가 어떠하든 ‘성조기 아래 하나의 미국인’이라는 모토가 성립된 것이다. 두 번째로 다양한 문화에 대한 수용성보다는 ‘철저한 미국식 법치주의’를 전제로 한 ‘다문화 포용’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유럽의 주류 백인문화를 중심에 두고 흑인, 인도계와 아시아, 이슬람계를 차등 계열화하는 모습도 존재했지만 지금은 일부 백인 우월주의 세력을 제외하고는 출신지역에 따른 차등 계열화 문제는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당선과 정책에서 보듯 다문화 국가임에도 이민자들에 대한 경계와 배척 분위기는 여전하다. 캐나다나 호주, 뉴질랜드는 백인 이주과정에서 진행된 원주민 학살에 대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미국은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다문화 포용성은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