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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의 역사 (5)

- 동양문명의 꽃이 된 다문화 국가 ‘당’


다문화의 역사 (5)|동양문명의 꽃이 된 다문화 국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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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사신도
 


중국과 동양문명에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은 당나라시대였다. 지금도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회를 ‘소강사회(공자에 의하면 백성들이 충분히 먹고 살며 법과 질서가 바로 선 사회로 대동사회 전 단계를 의미한다)’로 지칭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일대일로를 강조하며 ‘당나라 시대’를 거론하고 있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동양문명의 꽃을 피운 시대를 당나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는 위나라-수나라를 계승하며 만들어진 나라였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 이세민 부자는 수나라의 귀족출신이었다. 따라서 위나라와 수나라가 선비족 출신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당나라 역시 선비족 계열이 세운 나라로 볼 수 있다. 북방민족인 선비족은 한무제의 북벌에 밀려 북방으로 밀려갔으나, 한나라의 쇠퇴에 따라 대거 남하하였다. 그중 탁발선비, 모용선비가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들이 세운 나라들이 발호하면서 5호 16국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이 5호 16국 시대는 선비족을 비롯해 흉노, 저, 갈, 강 등 유목민족이 남하함으로써 한족 중심의 농경민족과 북방 유목민족이 대거 혼합되는 대혼란의 시대였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들은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점차 한족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면서 ‘호한 융합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북쪽에는 위나라, 남쪽에는 진나라(동진)이 대립하는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게 된다.

위나라와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몰락하자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당나라’였다. 당나라 역시 선비족 계열이었기 때문에 위나라와 수나라가 펼쳤던 호한융합정책을 그대로 계승했다. 즉 한족의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한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당나라는 주변 나라들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지배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는 이민족의 문화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모방함으로써 지배력을 확장해나갔던 로마의 방식과 비슷하다.

당나라가 다문화 국가의 면모를 갖춘 것은 다방면에서 드러난다. 그 첫 번째로 군사적으로 당나라 군대는 당의 군대와 이민족 세력이 연합한 연합군대의 성격을 띠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 왕족 출신의 고선지가 당의 군대를 이끌고 서역정벌을 한 것, 백제 출신의 흑치상지가 당나라의 장군이 되어 전쟁을 수행한 것을 보아도 드러난다. 즉 정복한 국가의 왕족과 귀족, 장군들에 대해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그 재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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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방기독교 대진사의 세례식 장면 벽화 우)한자-시리아문자병기기록
 



이 같은 모습은 당나라에서 관료들의 등용문인 과거제도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이민족 출신들에게 ‘당의 관료’가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최치원 등 신라에서 출세가 가로막힌 6두품들이 대거 당으로 몰려가 당에서 과거시험을 보고 관료로 등용되었다. 이는 신라뿐 아니라 다른 이민족과 국가에도 적용되었다. 다른 나라나 이민족 출신이라도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부여하고 일정비율을 선발한 것이다. 이는 로마에서 속주 출신 노예나 평민들이 관료로 출세했던 과정과 비슷하다.

그렇게 당나라의 관료로 출세한 사람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킨 안녹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안녹산은 안씨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우즈벡키스탄 지역의 소그드출신이었다. 그는 랴오닝성 차오양현에서 출생했는데 아버지는 소그드인 무장이었고, 어머니는 돌궐족 무녀였다. 원래 안녹산은 이민족 출신이었는데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양아버지인 안씨 성을 이어받았다.

그는 6개 국어를 구사하여 영주에서 무역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30대에 유주절도사인 장수규를 섬겨 무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그도 742년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현종의 신임을 받고 양귀비의 양자가 되었다. 744년엔 범양절도사를, 751년엔 하동절도사를 겸임하여 당나라 병력의 1/3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양귀비와 이임보가 실권을 장악한 뒤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이 안녹산의 모반조짐을 보고하자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거병하였다.

당나라의 낙양을 점령한 뒤 대연황제라 칭하고 이어 수도 장안과 화북지방을 장악했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도 자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복한 장안을 방치하고 시력이 약해지는 등 건강이 악화되자 측근이었던 환관 이저아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안녹산의 친구였던 사사명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안사의 난(안녹산-사사명의 난)이라 칭한다.

종교에서도 비슷하다. 당나라에서는 인도로부터 전해진 불교가 융성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동방으로 진출한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는 물론 이슬람교까지 공존했다. 그중 중국에 진출한 동방기독교(경교)는 당나라 황실 이씨의 시조인 노자의 도교와 결합하여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당이 지배하고 있는 지방의 600개 현에 동방기독교 예배당이 설립되고 일정한 봉토를 하사받아 운영하는 혜택
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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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방기독교 십자가 문양 우)성모-아기예수상
 



지금도 서안에는 대진사(기독교+도교)가 남아있는데,당시 예배당의 신부는 머리를 깎고 목탁을 치며 성경을 낭송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동방기독교(경교)에 대한 특혜와 예배당의 부패에 반발하여 소금상단을 이끌던 왕선지, 황소가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황소의 난’이라고 칭한다. 당시 당나라 말기에는 안사의난 이후 지방 절도사들의 세력이 확대되어 독립 세력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번진세력이 늘어나고 중앙관리와 환관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백성에 대한 수탈아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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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의 상
 


특히 희종의 건부연간(乾符年間)에 전국에 기근이 들었음에도 소금세가 높아져 소금밀매가 성행하였다. 소금밀매는 앞서 이야기했던 동방기독교(경교) 예배당의 성직자들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교도들의 부패에 소금상단의 두령이었던 왕선지(하남성)와 황소(산동성)가 반란을 일으키고, 예배당과 연관된 이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반란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났고 황소의 군대는 낙양과 장안을 함락하였고, 희종은 사천성으로 피신하였다.

황소는 장안에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 연호를 금통이라 부르고 항복한 관리를 기용하여 통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정권의 경제적 기반은 취약하였으며, 당나라 왕조를 돕는 돌궐계 토벌군 이극용 군대에 패하여 동방으로 피신하였다가 산둥의 타이산 부근에서 자결하였다. 황소의 난으로 당 조정의 지원을 받던 동방기독교의 수많은 성당이 불태워졌으며, 산동 등 해안가의 이주민 집결지(신라방, 파사방 등)가 폐허가 되고 끝내 당나라가 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나라 시대에는 각종 문화와 문물의 교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주변 국가들의 이주민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방’이 존재했다. ‘신라방’ ‘파사(페르시아)방’ 등이 그것이다. 그곳을 통해 수많은 문화와 문물의 교역이 이뤄짐으로써 서양의 로마, 동양의 당나라라는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다. 또한 한나라시대에 개척된 실크로드가 실질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중앙아시아, 로마와도 활발한 교역이 이뤄졌다.

하지만 당나라 후기에 들어와 당 황실이 안락과 부패에 젖은 사이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등 민란이 거세게 일어나며 다문화, 이주민에 대한 배척분위기가 높아지고 혼란스런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민족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아지며 한족 중심의 국가건설 욕망이 높아지며 조광윤의 송나라가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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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교 대진사탑
 


이렇게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문명의 꽃을 피운 당은 무너졌다. 하지만 서양의 로마와 함께 동양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당나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문화 정책’이었다. 애초부터 ‘호한 융합정책’을 계승하고 표방했으며, 관료 등 인재선발에서도 주변 국가와 이민족출신을 적극 등용했고, 종교와 문화에서도 이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꽃을 피웠다. 심지어 군대마저 이민족 세력을 적극 수용하여 ‘연
합군대’를 편성하고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