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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의 역사 (3)

- 진시황의 다문화 통일 혁명:

   강력한 법치, 다문화 사회 통합, 차별 없는 인재 등용


글.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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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될 위기에 놓였던 이사가 진왕에게 간언하기 위해 쓴 상소문인 <간축객서>
 


중동과 그리스에서 다문화 포용의 정신으로 세계제국을 일군 키루스 2세(BC 585?~529)와 알렉산더(BC 356~323)가 있다면, 동양권에서는 다문화 포용의 정신으로 통일제국을 이룬 진시황(BC 259~210)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변방이었던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키루스 2세가 나왔다면, 그리스 문명의 변방인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가 나왔다. 또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서쪽 변방에 불과했던 진나라에서 시황제(영정)가 나온 것이다.

이렇듯 변방에서 중심 국가를 제압하고 제국을 일구고,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 일류사의 보편적 과정이다. 왜냐하면 변방에서는 그만큼 환경에서 척박하고, 또 다양한 제 종족이 어우러지고 있기 때문에 배타적이지 않고 수많은 인재와 기술들을 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의 서쪽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진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진나라는 서융 등 제 종족의 융화와 단결 그리고 출신국에 가리지 않는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진나라가 통일제국의 기틀을 세운 것으로 법가사상에 입각한 ‘상앙(본명:공손앙)’의 변법 개혁정치에서 찾곤 한다. 위나라 출신인 상앙이 진나라에 건너가 변법의 기틀을 세우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호적제도, 십오제, 연좌제, 군수공작제, 분가정책, 토지개혁과 국가 수전제도, 부세제도 등 각종 법을 제정하여 국가개혁을 밀어붙였다. 법 앞에 평등을 주장하고, 심지어 법을 어긴 태자에게 형벌을 가했다. 그 결과 상앙은 인심을 잃고 탄핵당하여 거혈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변방에 불과했던 진나라는 크게 부강해졌다.

이러한 상앙의 법치주의 개혁은 서융 등 변방의 오랑캐, 외민족과 혼합사회를 이루고 있는 진나라에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개혁정치였다. 즉 각 부족과 지방 호족들이 할거하는 변방의 진나라에서 강력한 법치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적 기틀을 세우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강력한 법치를 통해 사회의 질서가 바로잡힘에 따라 진나라는 크게 융성하게 되었고, 상앙을 받아들였던 효공 이후 100년 만에 전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나라에서 법치주의 기틀을 세우는 데 있어서 위나라 출신인 상앙이 있었다면, 소양왕과 장양왕, 진시황 시대에는 범저와 여불위 그리고 이사와 정국이 있었다. 범저는 상앙과 같은 위나라 출신으로 모함을 받아 이름마저 바꾸고 떠돌던 식객이었다. 그가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진나라에 가서 소양왕을 알현하고 소양왕의 측근이 되었다. 그는 외교술의 기본이 된 ‘원교근공(먼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의 책략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범저가 원교근공책을 펼치기 전에 진나라는 근교원공책을 펼쳤다. 즉 가까운 조나라와 친하고 먼 제나라를 공격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범저가 원교근공 책략을 설파하며 가까운 조나라를 공격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것이 전국시대에서 통일국가로 가는 전환점이 된 ‘장평대전’이다. 전국시대 양대 맹장인 진나라의 백기장군과 조나라의 염파장군이 붙었는데, 범저는 조나라 조정과 염파장군 사이의 이간책으로 장평전투가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다.

여불위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한나라 양적(사마천 <사기>, 유향의 <전국책>에는 위나라 복양 출생으로 나온다)출신이었다. 그는 큰 이문이 남는 사업을 위해 조나라에 볼모로 잡힌 진나라 왕자인 영이인(자초, 진시황의 아버지)과 친분을 쌓고, 자초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애첩인 조희(진시황의 어머니)를 자초에게 보내어 왕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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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소양왕에 이어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으나 곧바로 죽었고, 뒤이어 안국군의 양자가 된 영자초(장양왕)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여불위는 상국의 벼슬에 올랐다. 장양왕이 죽자 자신의 애첩이었던 조희와 함께 진시황을 왕위에 올렸다. 그는 왕후인 조희와 불륜관계를 갖다가 발각될 것이 두려
워 노애를 붙여주고 물러났다. 하지만 노애의 반란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그도 결국 자결을 하게 되었다. 그가 진시황에게 추천한 인물이 이사였다.

<간축객서>로 유명한 이사는 초나라 출신이었다. 그는 순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유가의 인의설에 동의하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하는 진나라로 떠났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그가 말단관리로 있을 때 뒷간 쥐는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오면 놀라 경계를 살피는 반면, 곳간 쥐는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면서도 사람이 오는 것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을 보며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진나라에 가서 권세를 떨치던 여불위의 집사가 되어 진시황에게 천거되었다. 하지만 여불위도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고 또 한나라에서 관계수로 정비와 치수를 위해 진나라로 온 정국이 한나라의 스파이임이 밝혀져 외국인 출신의 벼슬아치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즉 진나라의 위세가 드높아지자 주변국인 한나라에서 군사양성이 아니라 민생에 힘을 쓰도록 정국을 파견하여 관계수로 정비와 치수에 힘쓰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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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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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상앙
 


이렇게 여불위가 축출되고, 정국마저 한나라의 간첩으로 발각되어 외국에서 온 벼슬아치(객경)를 몰아내자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이에 이사도 쫓겨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이사는 자신의 뛰어난 문장으로 <간축객서>를 진시황에서 상소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진나라가 오늘날처럼 부국강병이 된 것은 인재를 구분하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법치개혁을 이룩한 상앙과 원교근공책을 펼친 범저, 등의 공을 열거했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기에 그 거대함을 이룰 수 있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기에 그처럼 깊어질 수 있고, 왕은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기에 그 덕을 밝힐 수 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그의 <간축객서>는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통일을 위해서 인재들을 더 넓게 포용하고, 그들의 재능을 사야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간축객서>가 진시황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진시황을 도와 전국의 천하통일을 도모하는 핵심측근이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의 간첩임이 드러났던 정국도 관계수로 정비와 치수 사업에 계속 종사하게 었다. 그에 따라 진나라는 6개 나라의 부를 합친 것보다 많은 재물과 부를 쌓게 되었다(사마천 <사기>). 그리고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전국통일을 이룬 뒤 문자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화폐통일, 도로의 연결 등 통일중국의 기틀을 세우게 되었다. 진시황과 이사가 시행한 문자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화폐통일,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은 지금까지 중국이 통일된 국가로 남을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이는 키루스 2세의 관습과 종교 문화에 대한 관용, 알렉산더의 다문화 융합정책과 도로와 도시건설(알렉산드리아), 역참제 등과 비견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시황과 이사의 업적은 통일제국 이후 진시황의 전횡과 폭력적 통치로 진나라가 급속히 멸망함으로 인해 크게 부각되진 못했지만, 이후 등장한 한나라 등에서도 이사의 개혁정치가 지속되어 중국의 통일 제국이 계속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다문화 융합정책(법치)과 널리 인재를 구한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 중국은 한나라 이후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흉노제국을 무너뜨리고 고조선 지역에도 한사군을 설치하는 등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이다.

즉, 전국 7웅 중에서 서쪽 오랑캐라고 손가락질 받던 진나라가 통일제국을 이룩한 것은 다양한 종족과 할거하는 호족들을 통합시키는 단호한 법치제도를 마련한 것과 범저의 군사외교술, 정국의 관계수로 개설과 치수 그리고 출신국을 가리지 않고 이사와 같은 인재를 널리 구하고 포용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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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문자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