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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의 역사 (2)

알렉산더의 세계시민국가 건설과 헬레니즘


글.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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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인류의 역사를 다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대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과 대제국 건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진행된 300년간의 헬레니즘 시대였다. 물론 이외에도 다문화가 꽃핀 시기는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와 세계제국 로마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이세민의 정관의 치)와 미국이 주도한 2차 대전 이후의 세계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알렉산더의 제국건설과 헬레니즘이 가장 멋진 다문화 이상사회의 꽃을 피웠다. 그만큼 알렉산더는 생각과 사상, 정책에 있어 다문화에 열린 생각과 융합적 사고를 했었고, 찬란한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그 헬레니즘의 형향으로 서쪽으로는 로마시대가 열렸고, 이집트 등의 아랍과 중동에서는 수학과 과학, 천문학 등 각종 학문이 꽃피웠으며 동쪽으로는 간다라 불상 등 찬란한 문화유산이 전파되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변방인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필립포스 2세에 의해 그리스의 맹주로 등장하기 전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야만인들이 사는 변방의 시골구석에 불과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테베에서 인질 생활을 하며 선진적인 군사전략과 군비확충에 관한 연마를 한 필립포스 2세가 등장하면서 일약 그리스의 맹주로 등장했다.

알렉산더는 그런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더구나 필립포스 2세가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를 버려두고 클레오파트라(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는 동명이인)에게 새장가를 들면서 왕위계승조차 희망이 없었다. 알렉산더가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출전했지만 패전 장수가 되었고, 아버지의 결혼에 반대했던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고 말았다.

그가 간신히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설이 떠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가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도 있고, 필립포스 2세가 새 장가를 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어찌 되었든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강렬한 도움으로 그는 왕위를 계승했다.

그 후 알렉산더의 어머니는 필립포스 2세의 두 번째 부인과 아들을 죽여 버리고 섭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섭정을 하며 권력을 휘두르려던 어머니마저 죽여 버렸다. 이처럼 알렉산더는 권력투쟁과 전쟁에서 잔혹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구해준 부하마저 참수했을 정도로 ‘권력의 상대’에겐 용서가 없었다.

그러나 항복한 자나 문화적인 분야에서는 대단한 포용력을 발휘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다리우스 대왕의 가족을 극진히 보살폈다. 또한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 성대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키루스 2세의 무덤을 복원해주었고, 저항하지 않는 피정복민에게 한없이 인자했다. 이러한 모습은 당나라 이세민이나 몽골의 칭기즈칸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알렉산더는 동방원정을 떠나면서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주장했다. 그리스 동맹군이 원정에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세계가 다 우리의 고향’이라며 ‘세계시민국가’를 주창했다. 그는 원정하는 곳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함으로써 세계제국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중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헬레니즘 시대를 주도하는 중심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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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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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알렉산더>에서 아버지 필립포스2세와 알렉산더
 


그가 그리스를 떠나 페니키아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다리우스 대왕과의 수차례 결전을 치르며 바빌론과 페르시아 전역을 정벌했다. 그때마다 그는 선두에 서서 전쟁을 지휘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에 걸쳐 목숨까지 위태로운 부상을 당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원정을 멈추지 않고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 펀잡 지방까지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동성애 상대이자 사랑하는 부하였던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실의에 빠졌다. 그러고 난 뒤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원인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있고 헤파이스티온에 대한 연민이 너무 심해 폭음을 하면서 열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중 두 번째 설이 유력하다.

어쨌든 그는 죽기 전에도 정복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적극적인 동서 문화 융합정책을 펼쳤다.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등 외지인과의 결혼을 장려했고 그 자신도 페르시아 제후국왕의 공주인 록산느와 결혼했다. 또한 대규모 합동결혼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를 출발하며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주장했지만, 동방 각 지역을 점령한 뒤에는 동서양의 문화에 대한 우열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역시 그리스 변방 출신이었고, 아테네 등 그리스 본류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그리스 동맹군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 그리스 비우대 정책으로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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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부르 박물관에 소장된 밀로의 비너스상
 


그럼에도 알렉산더 제국에서 그리스어는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알렉산더가 죽은 뒤 장수들에 의해 건설된 4개국에서도 동서융합 정책은 계승되었다. 그중 이집트를 차지한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가장 빛나는 문화를 창출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수많은 도서가 집결되어 있었고, 각종 과학과 학문이 꽃피웠던 글로벌 도시였다. 이렇게 시작된 헬레니즘 시대는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1세기 전후까지 3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주변 야만지역에 대한 배타적 생각을 버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세계 시민주의적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폴리스 국가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개인중심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개인주의적 사고를 반영한 철학조류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르스 학파’였다.

스토아 학파는 개인의 행복은 이성적 절제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반면 에피쿠르스 학파는 개인의 행복은 쾌락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헬레니즘 시대에는 자연과학이 매우 발전하였다. 지구둘레를 정확히 측정한 에라토스테네스, 물에 뜨는 부력 즉 비중의 원리를 밝힌 아르키메데스, 평면기하학의 에우클레이데스, 인체해부학의 헤로필로스 등이 이 시대 과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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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불상
 


또한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은 매우 역동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띄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라오콘 군상’이라든지 ‘밀로의 비너스’는 잘 알려진 조각들이다.

또한 헬레니즘 미술은 동양으로 건네져불교 최고의 미술로 극찬되고 있는 간다라 불상들이 제작되었고,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건축양식에서는 로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콜로세움과 같은 건축물을 남겼다.

이처럼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라는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시대였다. 그래서 혼합문화 시대로 부른다. 알렉산더와 부하들이 동방원정을 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고, 페르시아의 각종 물품과 제도가 그리스로 전달되었다. 그런 교류 속에서 학문, 문화 예술의 수많은 원형이 만들어졌다. 또 개인은 도시국가적 공동체 단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늘어나고 더 많은 자유를 추구했다.

그 자유에는 내적이고 정신적인 자유뿐 아니라 쾌락적인 자유도 포함되었다. 노예들은 노예제 폐지를 요구했고 각종 공산주의적이고 몽상적인 사회개조설이 등장했다. 여성들의 지위도 매우 상승했다. 법률적인 보장은 없었지만 여성 통치자들도 생겨났고 남편과 별도의 재산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종교에서는 여성 사제들이 집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단한 서약으로 결혼과 이혼이 자유롭게 이뤄졌다. 이렇듯 알렉산더의 세계시민국가 건설의 꿈은 인류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