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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와 전통문화

- 외래문화는 어떻게 전통문화가 되나?


글.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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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도
 



동양에서 식사할 때 주로 숟가락과 젓가락이라는 두 개의 도구를 쓴다. 반면 서양에서 식사 때는 세 가지 도구를 쓴다. 스푼(숫가락), 포크, 나이프(칼)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도구는 서양의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스푼, 포크, 나이프가 서양식사의 전통문화로 굳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세 때는 쓰이지 않다가 근세 이후 유럽의 전통문화가 된 것이다.

1363년에서 1380년까지 재위한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남긴 재산 목록에 금과 은으로 만든 포크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장식용이었다. 실제 포크가 식사용으로 사용된 것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 앙리 2세에게 시집을 갔던 까트린느가 요리사들과 함께 식탁의 도구들을 챙겨가면서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서양의 식탁에서 포크가 사용된 것은 기껏해야 500년이 채 되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고 포크가 소개되자마자 곧바로 유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와 로마제국에서 사용되던 포크는 서로마제국에서 점차 사라졌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즉, 포크의 모양이 그리스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무기로 사용하는 삼지창을 닮은 것이었다. 이는 악마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또 하나님이 부여한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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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탁의 포크, 나이프, 스푼
 


그렇다면 포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사실 포크의 기원은 제각각이다.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도 만들어졌고 중국의 고대문명에서도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치자 문명, 기원전 2000년경). 또 후한 시대의 무덤에서도 돌을 깎아 만든 포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포크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 등 고대 근동과 중국에 각각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주로 삶은 고기를 건져 올리거나 익힌 고기를 집는 데 많이 사용 되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젓가락을 많이 사용하면서 포크가 사라졌다. 그래서 동양의 식탁에서는 포크 대신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자리 잡았다. 반면 이집트나 고대 근동(페르시아 등)에서는 포크가 계속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시대가 되면서 포크는 보편적인 식사 도구로 사용되었고, 이어 로마제국에서는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다가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리게 되면서 동로마제국에서만 사용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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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로마제국에서 가톨릭의 영향으로 사라진 포크가 다시 등장한 것은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베네치아 등의 상업 활동을 통해서였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동로마제국에서 사용되고 있던 포크를 이탈리아에 도입한 것이다. 동로마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그리스지역과 흑해 연안 동유럽지역 등에서 사용되던 포크를 이탈리아에 도입하고, 이어서 신성로마 제국과 프랑크왕국 등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럼에도 서유럽에서 포크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 총독의 후계자인 도메니코 실비오가 동로마 공주인 테오도라와 결혼했을 때 테오도라가 포크를 가져왔는데, 이를 보고 페트루스 다미아니 주교가 강력하게 비판하며 스캔들로 비화되기도 했을 정도다. 따라서 중세 서유럽 지역에서 포크가 존재하긴 했지만 실제 사용되기보다는 장식용과 과시용에 불과했다.

그래서 메디치 가문의 공주인 까트린느가 결혼하면서 프랑스로 가져간 포크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까지는 약 1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남자가 포크를 사용하면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사람이며 여자 같다는 조롱을 받아야 했다. 16세기가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독일에 전파되었지만 여전히 거부반응이 많았고 심지어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황족들에게 포크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전 유럽에서 포크 사용이 유행된 것은 18세기 귀족들의 사교활동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이어받은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포크의 형태도 고깃덩어리를 찍어 먹기 위한 두 갈래의 포크에서 파스타 등 다양한 음식을 먹기 위해 세 갈래, 네 갈래의 포크로 개량되어졌다. 지금은 스푼과 포크를 결합한 스포크라는 도구도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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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창을 든 포세이돈
 


이렇듯 어떤 지역에 외래의 문화가 들어와 전통문화로 자리 잡기까지는 다양한 경로와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을 거치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화도 존재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전통문화로 자리 잡는 경우도 많다. 즉, 포크가 서유럽 쪽에 전달된 후 처음엔 거부반응이 많았지만 효용성이 입증된 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게 되었고 그 기간은 짧게는 300년, 길게는 500년 정도가 된다.

그것은 복식의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치파오’라는 전통복식이 있지만 그것은 청나라 이후에 자리 잡은 것이다. 그 이전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에는 치파오 라는 전통복식이 아니라 한푸(한복)라는 전통복식이 있었다. 한족의 전통복식은 한푸라고 하는데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치파오가 전통복식으로 대체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복식인 한복은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와 북방 유목민족의 복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의 복식은 상·하복이 분리되고 천을 두르는 형태가 아닌 바지를 입는 형태였다. 이것이 그대로 북방 유목민족에게 전달되고 한반도로 전해져 우리의 전통복식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식이 되었다가 삼국통일 이후 우리의 전통복식으로 굳어진 것이 신라의 복식이다. 반면 백제의 복식은 일본으로 건너가 기모노의 원류가 되었다. 기모노의 여성복식은 백제의 복식에 당나라 복식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모노 형태가 완성되었고, 남성 복식은 백제 복식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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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통복장인 한푸
 



음악이나 악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전통악기 중에 가야금, 아쟁 등 현악기들이 있는데 그 기원은 한반도가 아니다. 혹자는 금관가야의 우륵이 만들었다고 해서 가야금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지만 실제 가야금과 같은 현악기의 기원은 페르시아의 ‘창’이라는 악기이다. 이것이 당에 들어가 ‘쟁’이 되고, 신라에 들어와 가야금 등으로 변형되고, 일본에서는 ‘고토’가 된 것이다.


최치원에 의하면 소그드인들이 전한 음악을 신라 고유의 ‘향악’에 대비해 ‘속악’ 이라고 했으며, 신라의 음악은 ‘향악’ ‘당악’ ‘속악’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향악과 속악을 묶어 ‘속악’이라고 통칭을 했다. 따라서 우리 전통음악은 고유의 향악과 속악이 기본 원류를 형성하고 있던 셈이다. 여기에 당악의 영향이 가미되어 한국전통음악이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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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사자놀이. 사자는 중앙아시아 스텝지방에서 살던 동물이기 때문에 북청사자춤도 중앙아시
아 소그드(우즈벡) 지역에서 건너와 전통놀이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우리나라 전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통놀이도 있다. 봉산 탈춤과 북청사자춤이 그것이다. 원래 사자는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동물이었고 중앙아시아 스텝지방과 인도, 중동, 아프리카에 걸쳐 서식했던 동물이다. 따라서 사자탈을 쓴 봉산탈춤과 북청 사자춤은 한반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즈벡 지방에서 살았던 소그드인의 풍속에서 전해진 것이다. 그것이 많은 시간을 거치며 우리의 전통놀이가 된 것이다.

이렇듯 외래문화와 전통문화는 넘나들 수 없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전해지고 그것이 토착화되는 과정을 거쳐 전통문화가 되는 것이다. 길게는 몇 천 년 걸려서 정착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게는 300~500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완전한 전통문화로 자리 잡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외래문화라고 배척받는 것들도 어느 순간에 한국의 전통문화가 되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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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창’이라는 악기에서 기원한 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