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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

문화재가 되다


글,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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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불교계 대표 잡지인 잡지인 <佛敎>를 국가등록문화재(제782호)로 지정한 일이 그것이다.


잡지 <佛敎>는 1924년 7월 15일 창간되어 1933년 108호 종간되었는데 그 서지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발행겸 편집인 : 권상노(1879~1965)
○인쇄소 :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인 : 노기정
○발행소 : 불교사
○정가 : 20전
○면수 : 78면

항상 창간사에는 특별한 뜻을 담는 법이라 조금 살펴보기로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창간되어 佛日再輝(불일재휘)라는 ‘총독각하제자’를 화보로 실은 것을 보니 그 어두운 역사의 새김이 아직도 통증을 유발한다.

凈法界身(정법계신), 本無出沒(본무출몰), 大悲願力(대비원력) 示現受生(시현수생)으로 시작되는 창간사 말미에 ‘우리의 행진할 방도’가 실려 있는데 조선불교는 일본불교 발전의 경로와 우리 민족성의 다름에 기인한 특색이 있음에 주목하고 조선문화의 일대요소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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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금강산> 창간호. 1935년 9월, 우)<금강저> 24호. 1939년 7월. 조선불교동경 유학생회(일본)
 


비록 지금은 그 지배 속에 있으나 조선불교문화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일본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 강조한다. 그 준비로 불교 재단법인교무원이 성립하여 포교비, 포교도서간행의 지원만이 있을 뿐이고 시설의 불충분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근본이라고 할 만한 그 시설은 바깥에 있지 아니하고 안에 있다는 것을”이라고 강조함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일 듯하다. 물질이 흐드러진 속에서 정신이 가난해지는 법이니 당시 불교인들의 단단한 불심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현대인이 보기에 무지막지한 한문의 혼재로 인하여 창간호 목차를 대충 훑어볼 수밖에….

◇백용성 조사의 선화루설(禪話漏設)
◇이조불교사 제1편 -무능거사 - 이능화
◇개성으로부터 보편성에 - 해원
◇불교연구 - 향산외인
◇불교의 의의와 목적 - 오봉산인
◇불교와 인도의 관계종교
◇신심과 효성이 지극한 김순득의 ‘심로에서 다시 인간’이라는 제하의 불심 가득한 투고. 그리고 竹倚問答(죽의문답)과 투고환영이 잡지의 틀을 갖추었다 하겠다.

1932년 1월호(91호)의 권두언에 이어 한용운의 ‘사(寺)법계정에 대하야’가 실려 있고 뒤를 이어 ‘사(寺)법개정에 대한 의견’이 개진되어 있는데 필자가 여럿이다. 송종헌・박한영・김영・김경주 등의 개혁안이 실려 있어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짐작할 만하다.

◇불교의 처세술 -김경주
◇불교에 대한 희망 - 소설가 이광수, 이극노, 안확, 양봉근, 서상일, 김중세, 명제세, 주요한,최규동, 이선근,
◇여신도로서의 신년감상 - 김일엽

불교의 교리나 사법 같은 내용이 아니라서 ‘여신도로서의 신년감상’의 내용을 조금 보기로 한다. 김일엽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끌림이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특히 “세상에 행복을 위하야 피 흘리며 싸움을 싸우는 이들은 행복이 손에 닿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다른 이가 뒤를 이어 싸우다가 또한 행복의 꼬리를 바짝 거머쥐고는 순간에 또 꺼꾸러지는 것이외다…. 내가 사는 집은 산기슭에 있는데 뒤로는 공동묘지가 설치되기 전 지금으로부터 20년부터 50년까지 이 동네 사람들이 죽으면 자유로 갔다가 묻어든 무덤이 수십 장이나 있는데 지난 가을부터 모다 파서 태우기로 되었나이다. 그 무덤의 가족들이 매일 와서 파내기를 오랫동안 하였는데 나는 일부러 파내는 그 해골들을 구경하였나이다. 허무한 인생을 보기 위하여…. 두개골 이빨이나 알아볼만하고 팔인지 다리인지 마디가 퍼석 부서지는 유스럼 검으스럼한 뼛조각들을 흙속에서 두 손으로 끄집어내어 백지에 싸놓고는 부서지고 삭아지는 그 해골이 무엇을 알리마는 그래도 산 사람의 자기들의 정으로 각색 실과와 술이며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설게 우는 사람도 있나이다.”라는 구절에 눈이 간다. 아마도 언제까지 우리 팔다리를 묶어놓을지 알 수 없는 지금의 코로나19 사태가 멀리 있을 것만 같던 죽음의 그림자를 가까이에 당겨놓은 때문인가 보다. 무릇 종교란 생・노・병・사에서 사의 문제를 더 숙고하는 게 아니던가. 사후의 생을 논함으로써 그 후의 생에는 사가 없어진다는 논리로 말이다.

   


- 우리나라 초기의 불교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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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월보> 14호. 19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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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16호. 1913년 5월. <조선불교월보> 제호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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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흥회월보> 8호. 19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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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총보> 2호. 19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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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 창간호. 19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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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 53호. 1928년 10월. 일본이 만든 불교 잡지 



뒷장 말미에 있는 ‘원숭이와 불교’라는 제하의 만해의 글은 별주부전을 인용하여 비구들에게 불법을 설파하는 내용인데 자못 읽을 만하다. 많은 대중을 염려하여 써놓은 듯하다.

이렇게 발행되던 잡지는 1년 후쯤인 1933년 7월경에 폐간한다. 이 후 4년 후 즈음에 속간이 나온다. <佛敎 신 제1집(1937.3.1.)>으로 속간되어 1944년 <신 제67집>으로 종간되는데 서지사항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발행 겸 편집 : 허영호
○인쇄소 : 대동인쇄소
○인쇄인 : 김현도 발행소 : 불교사
○정가 : 20전
○면수 : 60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해 - 불교 속간에 대하여
◇詩에 정중환 - 산상에서. 박병수 – 이마음.
◇소설에는 성북학인(한용운의 필명)이 ‘철혈미인’을 실어 문예면을 증면하였다. <불교> 잡지 중에 이당 김은호의 표지화가 있는 신44집 1943. 1월호가 눈에 띄고 속간호 이후에는 만해 한용운의 글이 많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말기 <불교> 목차를 보면 창씨개명한 흔적들을 볼 수 있어 친일문제는 불교계도 비켜갈 수 없었으니 그 시기가 계속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분노를 감출 수 없다.

해방 후 <신생新生> 2집-<불교佛敎>의 후신(後身). 1946.4.1. 발행 겸 편집인: 장도환(1926~?)-으로 불교잡지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해방 직후 몇 호를 간행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필자는 <불교佛敎> 1948년 8월 1일자와 1949년 6월 1일 간행한 잡지를 소장하고 있으나 통권호수를 표기하지 않아 안타까움이 있다. 2권에 실린 필자를 소개하면 장상길・장도환・허영호・서경보・김어수・정인보・아방자・조응준・곽기종・석환경・일벽・화자・한해룡・정진섭・김문오・금성(장도환의 필명)・김자호・적송・백경하 등이다.


- 잡지 <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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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창간호. 19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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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99호. 1932년 9월. 판권란에 발행인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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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 제1집. 193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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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 44호. 1943년 1월 창씨개명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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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2호. 1946년 4월. <불교>의 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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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1948년 8월. 통권호수 표기 없음
 

잡지 <佛敎>는 일제강점기에 창간되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속간을 하였고, 해방공간에는 <신생><불교>로 제호를 바꿔가면서 한국전쟁과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잡지다. 현재도 나오고 있는 불교계 최장수 잡지이기에 문화재로 등록되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불교야말로 아직도 우리 민족의 얼 속에 담겨있는 원액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