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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통해서 본

세계시민주의와 다문화


글, 사진.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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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지난달 연재한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본 인종주의와 다문화>의 글을 통해 인류는 서로를 차별하는 종족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의 세계관과 인류는 평등하다는 세계시민주의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면서 발전해온 역사였다. 그중 고대로 가면 갈수록 인류는 평등하다는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최초 세계제국인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성경엔 고레스 대왕으로 나온다)과 알렉산더 그리고 세계제국이었던 로마의 역사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세계시민주의적이고 다문화적인 세계관을 세계 최초로 구현한 것은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키루스 2세(BC 580~529)였다. 한국에서는 키루스 2세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양과 중동(특히 이란)에서는 세계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구약 성경에서는 ‘고레스 대왕’이라고 하며, ‘기름 부은 자(메시아)’로 추앙받고 칭송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즉 (나 야훼/여호와가)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는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 키루스 2세는 힘과 덕성을 겸비한 인류 최고의 영웅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면 조선시대 태종의 강력함과 세종의 인자한 덕성을 함께 갖춘 사람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키루스 2세가 태어난 곳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중동지역에서 바빌로니아 왕국이 멸망한 뒤 생겨난 메디아(당시 중동지역에서는 이란지역의 메디아, 터키지역의 리디아,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지역의 신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의 4대 왕국이 쟁패를 겨루는 상황이었다)의 속국인 아케메네스 왕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통치하고 있는 메디아를 멸망시킨 뒤 리디아와 하늘정원으로 유명한 신바빌로니아까지 무너뜨리고, 바빌론에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돈을 주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유대 신전을 짓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또한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각 종족의 신들에 대해 존중하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등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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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2세
 


그가 바빌론을 점령한 뒤 황제에 즉위하며 선언한 ‘키루스 실린더(원통)’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이름 붙여질 정도로 대단히 유명하다.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모조품이 뉴욕 유엔본부에 전시된 키루스 실린더(원통)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정복활동으로 생긴 노예는 해방하고 제국 내 국가들의 전통과 관습・종교를 존중하며, 어떤 신하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신전 등 공공건물을 지을 때는 노동자에게 무임금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임금을 지불한다.”

“나의 군인이 점령지 백성을 약탈하는 것을 엄금한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다면 어떤 종교나 직업을 선택해도 좋다.”

“연좌제는 없다. 노예를 금지할 것이며 모든 신하는 짐의 영토 안에서 남자와 여자를 노예로 거래하지 못할 것이다. 노예제는 폐지될 것이다.”

이 같은 세계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를 건설한 키루스 2세의 ‘다문화 관용’과 ‘세계 시민주의’는 페르시아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는 상인이지만 키루스 2세는 아버지로 불린다”며 그만큼 키루스 2세가 자상한 아버지와 같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키루스 2세의 정신은 알렉산더 대왕으로 이어졌다. 알렉산더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이 지은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훈)>를 애독하며 키루스2세의 다문화적 관용과 세계시민주의를 추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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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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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콜로세움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변방인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에 이어 즉위한 뒤 동방원정을 통해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인도까지 점령하였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으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더구나 아버지 필리포스2세가 어머니 올림피아를 버려두고 클레오파트라(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는 동명이인)에게 새장가를 들면서 알렉산더는 왕위계승조차 희망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출전했지만 패전장수가 되었으며 새장가를 반대하는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유배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아버지가 암살을 당하면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필리포스 2세 암살에 어머니 올림피아가 관여했다는 설이 있다). 알렉산더가 왕위계승을 한 후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지만 알렉산더는 어머니를 죽여 버렸다. 이렇듯 알렉산더는 권력투쟁과 전쟁에서는 매우 잔혹했다. 어머니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부하마저 참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항복한 자나 문화적인 분야에서는 대단히 포용적이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다리우스 대왕이 패한 후 가족마저 팽개치고 도망갔을 때 그의 가족을 극진히 보살폈다. 그리고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도 성대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또한 키루스 2세의 무덤을 복원해주었고 저항하지 않는 정복주민에겐 한없이 인자했다.

그는 페르시아를 점령한 뒤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주장했으며 “세계가 다 우리의 고향”이라며‘세계시민국가’를 주창했다. 그는 원정하는 곳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함으로써 세계제국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그리스 병사와 페르시아 여인들의 결혼을 적극 권장했으며 그 자신도 페르시아 지방 국가의 공주(옥사나)와 결혼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가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중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대표적이다. 그는 그리스에서 출발하며 “헬니즘의 세계화”를 주장했지만 각 지역을 점령한 뒤에는 동서양의 문화에 대한 우열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인들이 푸대접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 제국에서 그리스어는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알렉산더 사후 부하 장수들에 의해 건설된 4개국에서도 동서융합정책이 계승되었다. 이러한 동서융합정책은 로마가 점령할 때까지 300년간 지속되었고 세계국가 로마에서도 존중되었다. 그리스 석상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은 지금도 불교문화유적의 꽃으로 지칭되고 있으며, 학문과 문화예술이 꽃핀 알렉산드리아는 이후 로마 시대까지 각종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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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간다라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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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부르박물관에 소장된 밀로의 비너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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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뉴엘 칸트
 

그리하여 인류는 배타적 우월주의를 버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세계시민주의적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폴리스 국가 중심에서 벗어나 개인 중심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개인주의적 사고를 반영한 철학조류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였다. 그들은 개인이 어떻게 행복하게 될 수 있는가가 철학의 핵심 주제였다(스토아학파는 이성적 절제를 통해 개인행복을 추구했고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통해 개인행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헬레니즘 시대의 다문화융합, 세계시민주의는 초기 로마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각 종족과 국가의 문화가 존중되었다. 유대교에서 세계종교인 기독교가 탄생한 것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칸트에 의해 주창된 ‘세계시민주의’와 국제연맹, 2차 대전 후 국제연합(UN)이 탄생되고 운영되는 것도 세계시민주의와 다문화 포용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