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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를 통해서 본

인종주의와 다문화


글, 사진.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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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보면 인종주의(민족주의)보다는 오히려 세계시민주의, 다문화주의가 훨씬 더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세계시민주의와 다문화주의가 인류의 근원적인 사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문화는 인종에 대한 차별과 구분을 짓는 인종주의(민족주의)보다 세계시민주의(사해동포주의)와 다문화주의가 더 오래되고 근원적인 사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으로 구분한다. 여기에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멜라네시아인 등을 덧붙여 크게 4개 인종으로 구분한다. 이를 더 세분화하면 백인과 흑인의 혼혈(물라토), 백인과 황인의 혼혈(메스티조) 그리고 흑인과 황인의 혼혈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종 구분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생물학자 린네에 따르면 이종교배에 의해 탄생한 종은 생식능력이 없다. 말과 당나귀의 이종교배에 의해 태어난 노새가 그런 셈이다. 즉종이 다른 경우 유전자 염색채 배열이 달라 후세를 만들어낼 생식능력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흑인과 백인 혼혈인 물라토와 백인과 황인 혼혈인 메스티조는 후세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별개의 종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도 ‘아종’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그 경우이다. 개와 늑대와 비슷한 것이다. 어떤 종이 지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오랜 기간(약 100만 년) 격리되어 존속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종은 생식능력이 있긴 하지만 몇 대가 지나가면 원래대로 돌아가게 된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유전자만 남겼을 뿐 스스로 멸종하였고 지구상에는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 북동부(지금의 이디오피아나 소말리아 수단 등지)에서 등장한 후 6~7만 년 전 빙하기가 도래하며 먹을 것이 줄어들자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 각지로 흩어졌다. 당시는 빙하기로 지금보다 해수면이 150 정도 낮았으니 인도 남부 쪽과 인도차이나 반도는 물론 보로네오, 인도네시아 여러 섬들, 호주대륙까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처음 떠난 인류는 기후 조건이 비슷한 이들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인(흑인),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과 가장 유사한 얼굴과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다른 한편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오면서 육지가 있는 북쪽의 길을 택한 인류가 있었다. 이들은 육지로 연결된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으로 확산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만주와 연해주까지 이르렀다.

이들과 다르게 터키와 중앙아시아 흑해 연안의 북쪽으로 진출한 인류가 있었다. 이들은 일조량의 변화에 따라 자외선을 차단하던 멜라닌 색소를 벗고 백인으로 변화되었다. 털도 곱슬머리를 벗고 직모로 바뀌고 차고 습한 기후에 맞게 털도 많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남유럽과 중부유럽, 서북부유럽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극성을 부리던 빙하기가 점차 후퇴하자, 중앙아시아 천산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뚫고 티베트 몽골 고원으로 진출한 인류가 있었다. 그들은 추운 빙하지대를 넘어오며 신체적 변화를 겪어야 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털도 없어지고(심지어 에스키모와 인디언은 수염까지 나지 않는다) 얼굴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기보다는 둥글넙적해지고, 코와 같이 돌출된 부위는 되도록 작아진 것이다.

사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그리스 로마에서도 종족에 대한 구분은 있었지만 그리 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경우 흑인도 파라오가 될 수 있었고 로마의 황제에도 흑인이 존재했다. 반면 이집트에서는 백인도 노예로 생활했다. 그리스에서는 주변 종족에 대해 야만인이라는 배타의식이 있었지만 이는 고대 중국에서 주변 종족들을 오랑캐로 불렀던 것과 비슷한 것이지 배타적 의식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중세에 들어와서 종교적 배타의식과 결합하여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배척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종교지도자와 정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마타도어 때문이다.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흑사병을 퍼트린다는 마타도어가 퍼진 것이다. 중세를 휩쓴 마녀사냥의 주요 대상이 집시와 유대인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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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인종차별 철폐 캠페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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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인디언) 학살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사과
 

하지만 본격적인 인종주의는 식민지 개척을 하면서 탄생했다. 즉 식민지 개척을 위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고, 또 식민지배와 노예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인종주의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들이 이뤄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다인종설’과 ‘인종퇴화설’이다. ‘다인종설’은 인류는 처음부터 다른 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등인종(백인종)이 열등인종(흑인종 또는 인디언)을 지배하고 부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다인종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종 퇴화설’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저주받은 햄족 등이 점차 퇴화되어 열등하게 변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윈의 <종의기원>과 맞물리고 스펜서의 <사회학 이론>과 맞물려 더욱 고도화되었다. 즉 처음에 시작된 것은 하나였지만 자연환경과의 투쟁, 계급투쟁 등으로 경쟁력이 부족한 인류들은 점차 퇴화되어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종주의가 비도덕적이고 심각한 병리현상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었고, 저명한 인물들도 인종주의에 심취해 있던 경우가 허다하다. ‘인종 퇴화론’을 주장한 블루멘하흐를 비롯해 존 로크, 디드로, 달랑베르, 흄, 칸트, 헤겔까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철학자들을 망라해 인종주의적 편견에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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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총기난사 테러사건의 범인인 브레이빅.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인 브레이빅이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흠모했던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심지어 노예해방의 선구자 링컨까지도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에 그들이 백인과 같은 직업을 갖고 같이 생활하며 결혼하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절대 생각할 수 없다”고 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이나 대서양 연안의 섬에 흑인들이 거주하는 식민지를 개척하고자 했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유대인과 집시, 장애인에 대한 학살도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행된 것이다.

지금은 인종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편견에 대해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여전히 뿌리 깊은 편견과 제도적인 잔재로 남아있다. 독일과 일본,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혈통주의 국적법이 바로 그것이며, 배타적 민족주의 경향과 타 민족, 타 인종에 대한 불신과 차별의식이 그것이다. 특히 제국주의가 후퇴하고 민족자결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탄생한 신흥 국가에서 제국주의 잔재로 남겨진 배타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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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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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에 의해 탄압을 받았음에도 화해와 용서를 통해 국민통합을 이뤄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그럼에도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인종적 편견에 대한 국민교육이 제대로 활성화되고 있지 못하다.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감추고 싶어서일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종적 편견에 대한 감수성이 취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원주민 학살에 대해 국가가 사죄를 했지만 가장 잔혹했던 미국정부는 인디언 학살을 사죄하고 있지 않다.

한국도 제국주의 일본을 증오만 했지 동남아나 아프리카 출신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여전하고 백인에 대해서는 열등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다문화와 글로벌, 세계시민을 외치기 이전에 인종주의와 인종적 편견 그리고 배타적 민족주의의 폐해에 대해 심도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 그것이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 소양교육이며, 다문화와 글로벌 사회로 나아가는 기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