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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화가
공존하는 사찰
강화도 전등사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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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보전
 


바다와 맞닿아 있는 강화도는 거센 파도만큼이나 우리나라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담고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 단군의 얼이 담긴 마니산과 참성단, 고려시대 제2의 수도로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근대 개항 시기 발발했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강화도에서 펼쳐진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傳燈寺)도 수많은 강화도의 문화유산 중 하나다.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이 사찰은 381(소수림왕 11)년에 고구려 승려 아도가 참된 종교 혹은 참된 믿음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뜻의 진종사(眞宗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전등본말사지>의 기록대로라면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 것보다 3년이 빨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졌다. 전등사는 숙종 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를 관리하는 사찰이기도 했다.

정화궁주, 옥등을 바치다
지금 불리고 있는 ‘전등사’라는 이름에는 고려 25대 충렬왕(재위 1274~1308)의 정비였던 정화궁주의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당시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고려는 정략상 원의 부마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자비였던 정화궁주는 결국 별궁으로 내쳐졌고 이후 다시는 충렬왕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정화궁주를 내쫓고 대신 제1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 공주였다. 제국대장 공주는 원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했고 눈엣가시 같은 정화궁주를 별궁으로 내치고 충렬왕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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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보전
 


태자비로 17년간이나 있었는데도 정치적인 힘에 밀려 왕비가 될 수 없었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정화궁주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마음을 뒀고 전등사에 찾아와 불공을 드렸다고 전해진다. 이후 깨달음을 얻은 정화궁주가 옥으로 만든 법등과 대장경을 시주하면서 절 이름을 전할 전(傳), 등잔 등(燈)자를 써서 오늘날의 전등사란 이름으로 바뀌게 됐다. 정화궁주가 바친 옥등은 단순히 옥으로 만든 등잔에 그치지 않았다. 불법을 널리 전하는 등불과도 같은 의미가 있었으리라. 등불을 밝혀 어둠을 물리치는 것처럼 불법을 널리 펼쳐 이 세상을 돕고자 함이 옥등에 담겨 있었다.

대조루를 지나 부처의 세계로
전등사에는 일반사찰과 달리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남문 매표소에서 오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삼랑성 ‘종해루(宗海樓)’다. 이 삼랑성(三郞城)의 종해루가 전등사의 일주문 역할을 대신하고 있던 셈이다. 삼랑성은 솥단지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는 ‘정족산(鼎足山)’ 능선을 두르고 있어 ‘정족산성’으로 부르다 문화재청 고시로 2011년 7월 ‘강화 삼랑성’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이곳은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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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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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해루를 지나 전등사로 오르는 길 중간에 700년 된 은행나무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세월이 지나며 짓이겨 놓은 듯 주름 위에 또 주름. 골이 패고 또 패인 비틀린 옹이박이 투성이의 늙은 나무는 기나긴 세월 속 노고와 슬픔을 홀로 다 끌어안고 있는 듯하다. 오래된 은행나무가 주는 여운을 안은 채 조금 더 올라 사찰로 들어가니 전등사의 불이문(不二門)인 ‘대조루’에 다다랐다.
 
사찰의 여러 문 중 본당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은 말 그대로 둘(二)이 아니라는 뜻으로 진리는 곧 하나임을 의미한다. 이 문을 본당 입구에 세워 이곳을 통과해야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 부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연결된 하나라는 불이(不二)를 알게 되면 비로소 부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만든 기품
대조루 앞에 우뚝 서있는 전등사의 대웅보전.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단청이 벗겨지고 빛이 바랜 전각에서 은은한 아름다움과 기품이 새어 나온다. 1621년 광해군 때 지은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 으뜸 건축물로 꼽힌다. 법당 내에는 석가여래,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돼 있다. 굵은 기둥에 유연하고 날렵한 처마가 곡선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활짝 들려져 있다. 그 처마 밑 곡선 아래에는 나부상, 동물, 연꽃이 조각돼 있고 지붕 밑으로 넓게 퍼져 보이는 서까래는 웅장한 멋을 풍긴다.

처마 네 귀퉁이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나부상은 대웅전을 지은 목수의 사랑을 배신한 여인이라는 전설과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라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목수가 자신에게 못된 짓을 한 여인을 벌하고 그 죄를 씻어주고자 추녀 네 귀퉁이를 영원히 떠받들게 하는 조각을 만들어 넣었다는 전설이 있다. 자세히 보니 처마를 받치고 마치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다. 그 옆에 자리한 약사전은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건축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다. 조선 중기 다포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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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웅보전 처마에 나부상, 우)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대웅보전 현판과 단청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는 곳으로 쓰였던 향로전. 그 앞에는 눈길이 가는 ‘청동수조’ 하나가 놓여있다. 이 수조를 우물가에 두고 그릇 등을 씻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 옆에 삼성각과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다. 전등사의 명부전도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 귀왕 등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은 지장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때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삼성각은 산신, 독성(나비존자), 칠성 등 삼성(三聖)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이지만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 사상과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등사 내에는 두 개의 범종이 있다.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과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 등 두 개의 범종을 종각과 종루라는 이름으로 구분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보관된 전각은 ‘종각’으로,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은 ‘종루’로 칭한다. 사찰의 큰 종을 범종이라 하는데 어둠에 갇혀사는 중생들이 범종의 울림을 듣고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도록 기원하는 부처의 음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찰 경내 중앙에는 ‘소원탑’이 놓여있는데 소원을 써서 탑에 묶어 놓으면 매월 초하루 소진한다고 한다. 역사와 신화가 공존하고 있는 전등사를 둘러본 후 내려오는 길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물과 같은 ‘죽림다원’이 있다. 사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숲에폭 안겨 있는, 물 흐르고 꽃피는 자리에 있는 죽림다원도 전등사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뜰의 나무 그늘에 앉아 계절 꽃과 숲의 향을 저어 마시는 차 한잔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마음마저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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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무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