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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길 끝,

천국이 보이네

강화도 갑곶순교성지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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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강화도 앞바다에서 조선과 미국의 역사상 첫 번째이자 마지막 교전이 벌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미양요(辛未洋擾)는 그렇게 시작됐다.

효수터가 된 갑곶진두
신미양요 사건으로 대원군은 천주교를 더욱 심하게 박해했다. 이로 인해 갑곶진두(갑곶나루터)는 당시 많은 신자의 목을 베어 말뚝에 달아매는 효수터가 됐다. 이때 첫 번째로 갑곶진두에서 효수당한 사람이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이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이후 고종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내렸다. 이때 미국 함대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세 사람은 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된 것이다. 이들의 세례명, 후손, 생애 등의 관한 기록은 없지만 온전한 믿음 그 하나를 지켜낸 것만으로 많은 순례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천주교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는 문헌을 통해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지난 2000년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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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순교성지 입구에 세워진 예수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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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삼위비(초 봉헌대). 갑곶에서 순교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의 비.
 

순례자들의 발길 이어져
갑곶성지 출입구에는 양팔을 넓게 뻗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있어 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진리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많은 순례자는 갑곶성지 입구에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순례를 시작하게 된다. 지하성당을 지나 성지 초입 언덕 위에 기념성당이 있고 그 옆 나무계단을 오르면 효수대석을 만나게 된다. 순교자들이 효수형을 당할 때 쓰이던 것으로 알려졌다.

효수대석 뒤로 예수가 기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동상이 인상적이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무언가를 간절히 기도하는 듯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2000년 전 십자가 지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 예수의 모습이 마치 그러했을까란 생각에 순간 숙연해졌다. 또 한 켠엔 나란히 서있는 3개의 비가 눈에 들어오는데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3인의 순교 삼위비다. 그 앞 초봉헌대에는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가 담긴 작은 초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박순집 ‘신앙의 증언자’
이곳 순교성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 중 하나는 박순집(1830~1911) 베드로의 묘이다. 인천교구는 2001년 9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했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당시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그들의 행적을 증언하는 등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로 기록에 남아있다. 박순집 일가도 수난을 피해갈 수 없었으며 16명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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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집의 묘 안내판
 

그러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 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증언록’이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알렸다. 천주교 선교 초기 역사와 153명의 순교자 행적을 생생히 증언한 박순집 증언록은 총 3권으로 현재 절두산순교자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2천 년 전 예수는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신약성서> 사복음서에 보면 유대인들의 요구에 따라 십자가 처형이 확정된 후 로마 군병들은 그에게 직접 십자가를 지게 하고 성문 밖 처형장으로 데리고 갔다. 예수는 로마 군병들에게 수없이 채찍을 당해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온몸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무거운 십자가는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고 또 쓰러져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로마 군병들은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가 지던 십자가를 지게했다.

십자가 지기 전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성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14처로 된 ‘십자가의 길’이 나온다. 예수가 겪은 고난과 죽음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곳이다. 이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의 고난을 공감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 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실제 십자가 모형들이 준비돼 있다. 크기별로 준비돼 있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체험할 수 있다. 가는 길마다 예수가 당한 고난의 과정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을 14가지로 나눠 화강암 위에 동판으로 새겨 넣었다. 한처 한 처 십자가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거닐다 보면 비로소 성지 깊숙히 자리한 ‘천국의 계단’에 다다른다.

십자가의 길 끝에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남은 힘을 다 쏟아내 본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고난의 길을 순종하며 걸어 간 순교자들이 모두 그러했으리라.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올라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 곳이 신앙의 목적지인 천국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천국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며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려본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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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의 길, 2.예수가 기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동상, 3.천국으로 가는 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