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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가 담긴 곳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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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근대가 공존하는 서울 정동. 이곳 곳곳엔 많은 근대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덕수궁을 비롯해 구 러시아 공사관, 성공회 서울성당 등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 많다. 정동 한 바퀴를 둘러보면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 개신교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곳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이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정동제일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교회에 다다른다. 이곳 정동제일교회는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자신의 사택인 한옥에 예배실을 설치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전도 사업이 승인되지 않자 그는 배재학당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했다. 신도가 늘자 1897년 화강석 기단에 붉은 벽돌 고딕 양식의 ‘벧엘예배당’을 지었다. 돌출된 현관 등에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아 왕조의 주택 형식이 일부 반영됐다. 이후 성도 수가 늘어나면서 1926년 원형은 그대로 남겨두고 증축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교회 건물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촘촘한 붉은 벽돌 위에 난 아치형의 창문 그리고 창문의 하얀 창살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지붕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며 왼쪽에 솟아 있는 굴뚝은 다소 밋밋할 수 있는 지붕에 멋스러움을 더한다. 전체적으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보통의 고딕 양식 건물과 달리 뾰족한 첨탑 대신 삼각형의 박공지붕(책을 엎어놓은 모양의 지붕 형식)이 올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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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당시로는 예배당 모양이 매우 독특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고 해방 후 1977년에는 서울시가 사적 256호로 지정했다. 191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으나 6·25전쟁 당시 부서지면서 지난 2003년 복원됐다. 당시 장안의 학생과 교사 그리고 음악 전공자들이 출석해이 교회는 제대로 된 성가대를 갖추고 예배 시간에는 4부 찬양을 드렸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가 일본 헌병에 붙잡히기 전에 교회 내 파이프오르간 뒤에 숨어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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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

교회 맞은편 작은 뜰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흉상이 있다. 정동교회 초대 담임이기도 한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다. 아펜젤러는 최초의 미국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1885년 인천항을 통해 한국땅을 밟았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의 개항장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됐다. 그야말로 서구의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통로였다. 이때 선교의 문도 열리며 처음 입국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일본에 주재하던 미국선교사들이었다.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입국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서울 대신 인천에 일주일간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다시 입항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로 오기까지 인천 내리에 초가집을 빌려 38일간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우면서 선교를 구상했고 얼마 후 공식예배를 드리면서 인천에 내리교회가 창립됐다. 이후 서울로 간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에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 그는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 성서번역과 청년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 기독교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신학문에 뜻을 둔 청년을 모아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이다. 그 명맥이 오늘날의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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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감리교회 (1900년경)
 


그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당시 기독교는 낯선 서양의 종교로 인식됐다. 천주교 박해도 있었던 터라 선교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정부에서는 전도, 복음 사업 등을 공식 승인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등 간접선교로 선교를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189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를 지지하며 민족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17년 동안 활발한 사역을 펼친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성서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44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당시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익사했고 시신을 찾지 못해 현재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산실
정동제일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산실 중 하나였다. 종교 시설로 당시 경찰 행정의 손에서 피할 수 있었고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운영하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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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아펜젤러관
 



교회 내 작은 공간에서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독립신문과 각종 유인물들을 등사하고 배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주시경 선생, 유관순 열사등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출신 독립 운동가들이 신앙의 터전 위에서 애국심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담대한 심장과도 같았다.

1919년에는 담임목사 이필주와 전도사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3·1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도 이 교회 신자로 그의 장례가 치러진 곳도 바로 정동제일교회다. 개화 운동을 주도한 윤치호도 이 교회 장로였다. 1922년에는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여름성경학교’가 개설된 곳이기도 하다. 정동제일교회는 종교의 가치를 넘어 100여 년의 세월을 버티며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는 역사적 현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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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월미도 초입에 세워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중앙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 동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