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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아름다움,

종교로 만나다


한국 최초 한옥교회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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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조선 최초로 개항한 재물포항에 이어 선교사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연 강화도. 서구에서 만들어낸 근대문화가 넘치도록 들어와 동서양의 문명이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이룬 곳이다. 그곳에 동서양의 문화가 오묘하게 합쳐진 작고 아담한 성당이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한옥 성당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바로 그곳이다.

동서양의 오묘한 조화
19세기 말, 고종은 영국 해군에게 군사훈련을 맡겼다. 당시 영국군이 강화도에 주둔하면서 이곳에 무려 12개의 성공회 성당이 들어섰다. 영국군은 주민들과의 상생을 위해 종교에 ‘한국스러움’을 더했다. 작고 아담하다. 강화성당을 겉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한옥의 외관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가 연출된다. 화려하고 고풍스럽다. 경복궁을 지은 목수의 손길이 닿은 건물로 지붕 등 외부구조는 한국적 건축양식을 따라 지었고 내부는 로마 바실리카 양식을 본떴다. 이는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현지의 전통과 문화를 수용한다는 성공회 방침에 따른 것. 마당에는 오래된 보리수가 심겨져 있다. 참으로 오묘한 조화다. 성당 건물이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했다는 후대의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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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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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상이 있는 기둥 뒤로 예배당이 보인다.
 


1900년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이 건립
강화성당은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의 주도로 1900년에 완공됐다. 영국 성공회는 한국에서 초기선교 거점으로 강화를 택했다.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됐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와 유사한 입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 당시 고종이 조선수사해방학당을 강화도에 설립하면서 영국인 교수로 초빙했고 이 덕에 영국 성공회가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를 펼칠 수 있었던 점도 한 몫했다. 1896년 6월 13일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였던 코프 주교가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게 된 것을 계기로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강화성당이 건립됐다. 건립자는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C.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다.

사찰을 연상시키는 동양식 범종
강화성당에 도착하니 소담스러운 돌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돌담 사이 20여 개 계단 끝에 고고한 솟을대문(지붕이 우뚝 솟게 지은 대문)이 성당의 입구다. 한옥식 솟을대문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을 본뜬 원 안에 켈트 십자가를 덧그려놨다. 십자가에 곡선을 가미하고 둘레도 원으로 에워쌌다. 영국에 로마 가톨릭이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성 요셉의 켈트교회에서 쓰던 십자가다.

헨리 8세와 로마교황청의 대립 가운데 생겨난 영국 성공회지만 성공회 스스로 켈트교회를 연원으로 내세우고 있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또 하나 세 칸짜리 문이 나온다. 이 두 문을 외삼문과 내삼문이라 부른다. 한 쪽엔 동양식 커다란 범종이 달려있다. 흔히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범종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찰 종이 아니다. 종매로 때리는 당좌(撞座)를 연꽃 문양으로 처리하는 대신 성공회 십자가를 새겨 넣었다. 종유(鐘乳)가 있어야 할 부분에도 켈트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종을 매다는 종뉴(鐘紐)도 용머리 대신 성령을 상징하는 불꽃 모양으로 처리했다. 이 종은 1989년 교인들이 돈을 모아 마련한 것이다. 1914년 영국에서 만들어 들여와 원래 걸려 있던 종이 있었는데 1943년 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쟁물자로 공출해 갔다. 성당 입구 계단에 있던 쇠 난간도 당시 일본이 빼앗아 갔다. 지금의 난간은 일본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참회하고 한일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강화성당 축성 110년 기념일인 2010년 11월 14일에 복원 봉헌했다.
 
내삼문을 지나면 드디어 예배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붕선은 날아갈 듯 우아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이층 지붕을 얹은 중층 구조로 돼 있다. 언뜻 보면 사찰을 연상시키지만 지붕 중앙에 한자로 쓴 ‘천주성전’이란 편액이 이곳이 성당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절인지 성당인지 헷갈렸던 외부 모습과는 달리 예배당 내부는 확실한 서양식 바실리카 양식으로 꾸몄다. 바실리카란 ‘귀족의 집’이라는 뜻으로 로마시대 법정과 집회장으로 쓰던 공공건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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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떨쳐 선을 행하다
장방형 공간에 기둥을 세우고 양쪽과 가운데에 복도를 내 남녀 신자석을 구분했다. 신의주에 직접 가서 백두산 원시림 적송을 뗏목에 싣고 운반해 예배당 내부 20개 기둥으로 세웠다고 한다. 성당 중앙에 돌로 만든 커다란 세례대에는 修己(수기), 洗心(세심), 去惡(거악), 作善(작선) 등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자신을 닦고 마음을 씻으며, 악을 떨쳐 선을 행한다’는 뜻이다. 강화성당은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00년 국가 사적 제424호로 지정됐으며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예배당이다. 현재도 이곳에서 매주 주일 미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