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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은 백성을

위로한 도량


달마사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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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4월 11일)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에 백성의 한숨은 날로 깊어갔다. 일본은 한국어 사용금지, 일본어 상용, 창씨 개명 등 폭압을 일삼았다. 게다가 그들의 침략전쟁의 수단으로 전락해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며 절망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백성들의 망국의 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치욕적인 역사의 길목에서 희망을 잃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를 불심으로 이겨내게 하고자 마련된 작은 사찰이있다. 1931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세워진 ‘달마사’가 바로 그 곳이다.

서달산 중턱 아담한 사찰
달마사는 한강 그리고 강 건너 남산을 바라보는 서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사찰이다. 낮이면 흐르는 강물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고 밤이면 작은 불빛을 발하는 남산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심 속에서 찌든 혼탁한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전통사찰이다. 이곳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전각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삼성각, 다보탑, 영천,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일주문 등을 조성했고 1987년 대웅전을 중수해 현재에 이르렀다. 1988년에는 당시 문화부(현재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사찰의 역사성과 불교의 근대화 업적을 인정받아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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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사(동작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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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사 극락전
 

서달산 길을 따라 약 5분을 걸었을까. 어느덧 달마사 입구에 이르렀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문루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일주문이다. 화려한 단청이나 현판은 없지만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리라. 입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작은 여러 불상들이 봉안돼 있다. 대웅전 옆 극락전 맞은편에는 다보탑이 세워져 있다. 경주 불국사 내에 있는 다보탑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이곳 달마사에는 특이한 곳이 한 곳 있다. 삼성각 위로 움푹 솟아있는 ‘거북바위’다. 모양이 ‘거북이’를 닮아 거북바위라 불리는 이 바위는 1년에 두 번 한강으로 내려가 목욕을 한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그 아래에는 차가운 물이 솟는 영천이 있다. 동굴처럼 생겨 신비한 샘으로 알려진 영천은 옛날 용왕제를 지냈던 곳으로 지금도 용왕상이 놓여있다. 거북바위 아래 삼성각을 중심으로 기도처가 형성됐다.

국내 유일 고려대장경 전산본 보유
달마사는 절은 작지만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국내 유일의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전산화 출판본을 보유한 도량이기 때문. 달마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 옆에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있는데 이 연구소에서는 대장경과 관련한 학술·문화 행사,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다. 대장경 판본은 합천 해인사에서 보유하고 있지만 지난 2004년 연구소는 10년 간 고려대장경을 모두 전산화하는 작업을 통해 이를 출판했고 그 출판본을 달마사가 보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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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사 다보탑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지리산 화엄사에 파편조각으로 남아있는 신라화엄석경, 좀먹고 찢긴 서책, 그을린 목판본, 해외에서 찾은 초조대장경 탁본 등을 판독해 사이버 공간에 담아놨다. 524종의 경전이 들어있는 16만 2516매의 ‘디지털 고려대장경’이다. 사찰 본래의 수행·기도 기능은 물론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에 달마사는 여느 사찰보다도 부처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독립운동가 만공선사의 법통 이어
‘달마사’라는 이름을 들으면 얼핏 달마대사를 떠올릴 수 있지만 다르마(dharma, 진리)에서 비롯됐다. 달마사는 수덕사 만공선사의 법통을 이은 유심스님이 창건한 조계종 사찰로서 일제강점기 만공선사가 가끔 법문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만공선사는 일제강점기 김좌진 장군과 윤봉길 의사와 만나 교류했으며 특히 만해 한용운 선사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일본의 조선 불교 말살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해 조선 불교를 지켰으며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 불교계에 큰 맥을 형성했다. 만공선사가 독립운동에 전극 나선 것은 불교도 결국 나라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건 아닐까. 만공선사는 직접 이 절의 이름을 짓고 이를 다시 써서 편액을 내렸다. 당시 나라를 빼앗기고 불교는 왜색에 물들어 갔으니 수심사득한 얼굴로 이곳에서 한강을 바라봤을 만공선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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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만공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