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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들어온

종교(宗敎)

“이렇게 깊은 뜻이~”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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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문화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류의 삶에 종교가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종교가 없는 사람들조차 혹은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마저도 종교가 만들어낸 문화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가 끝없이 탄생하고 파생되며 성장하는 것도 이를 방증해주고 있다. 비근한 예로 ‘양심에 찔린다’는 말 자체에서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외에도 우리의 삶과 함께해 온 문화와 관습,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말에서도 종교적인 색채를 찾을 수 있다.

복을 빌던 ‘정화수’
동이 틀 무렵 첫 새벽,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을 장독 위에 올려놓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우리네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 처음 길은 우물물을 그릇에 담고 두 손 모아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를 올렸다. 우리네 선조들이 집안에 우환(憂患)이 있거나, 복을 빌고자 할 때 떠놓은 물을 우리는 정화수(井華水)라고 부른다.

흔히들 ‘정안수’라고 부르는 이 물은 물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해 첫새벽 목욕재계를 한 깨끗한 몸으로 정화수 앞에 섰던 어머니의 마음. 그렇다면 복을 빌기 위해 떠놓은 정화수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정화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천도교에는 ‘청수(淸水)’가 있다. 천도교에서는 청수 한 그릇을 봉전하고 기도를 드린다. 여기서 청수는 만물의 근원으로 맑고 깨끗하며, 강유를 겸전하여 밤낮없이 쉬지 않고 흐른다고 한다.

천도교의 모든 의식은 항상 청수 한 그릇을 봉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천도교 가정에서는 매일 저녁 9시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청수 한 그릇을 놓고 21자 주문을 105회 묵송하는 기도식을 갖는데, 이렇게 하면 온 가족이 화목해지고 큰 우환 없이 지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불교의 정화수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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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1월 24일 전북 진안군 마이산 도립공원 내 탑사에 놓아둔 정화수 그릇에 고드름이 하늘을 향해 열리는 ‘역고드름’이 솟아 있다.
(출처: 진안군청)
 

가톨릭에서는 성수(聖水)가 비슷한 개념으로 쓰인다. 흔히 그리스도교의 입교(入敎) 예식인 세례식 때 사용하는 성세수(聖洗水)를 가리킨다. 보통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성수를 사용한다. 개신교 성경 요한계시록 4장 6절과 15장 2절에 보면 ‘유리바다’가 나온다. 이 유리바다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하늘 영계의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수정’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유리바다 앞에는 요한계시록 즉 재림 때 있을 큰 환난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모여 있으며, 이들은 거짓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들 즉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들이다. 이 유리바다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고 하니 허물 있는 사람은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다. 구약시대는 물두멍(놋바다)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만 장막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또한 더러움을 씻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은 외워봤을 주문 “수리수리 마수리”의 정확한 표현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는 천수경에 나오는 말로 산스크리트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스님들이 독송하기 전에 입을 깨끗하기 위해 외우는 주문이다.

“좋은 일이 있겠구나, 좋은 일이 있겠구나, 대단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지극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아! 기쁘구나”라는 의미다.

여기서 ‘사바하’는 지난달 개봉한 영화 <사바하(감독 장재현, 2019)>로 인해 조금 더 대중과 가까워진 단어가 됐다. 신흥 종교 단체를 좇는 박 목사와 자신의 신을 좇는 종교단체 그리고 이들이 마주한 신의 실체에 대해 다룬 영화는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영화의 줄거리를 떠나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라는 ‘종교’를 다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든 소설이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종교’를 소재로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흥미와 함께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영화의 제목으로까지 나온 ‘사바하(娑婆訶)’는 불교 용어로 ‘원만한 성취’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진언의 끝에 붙여 그 내용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말로 산스크리트어 sv h 의 음사다. 기독교에서 기도의 마지막에 ‘그 내용과 같이 이루어지를 바란다’는 뜻으로 말하는 ‘아멘’과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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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도리 각궁”
아기들을 보며 자주 하는 말 중에 “도리도리 까꿍”이 있다. 머리를 좌우로 돌리는 동작인 ‘도리도리’는 천지만물이 무궁무진한 도리로 생겨났듯 너도 도리로 생겨났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도리도리(道理道理) 각궁(覺窮)’에서 나온 말로 ‘세상에는 도리가 있으니 자라면서 이를 깨닫기를 바란다’는 교육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궁극의 도리를 깨치라는 지혜가 담긴 말이다.

‘도리도리 각궁’은 한국의 전통 육아법으로 아기를 어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단동십훈(檀童十訓)>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단동십훈>은 단군왕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그 시대 왕족들의 교육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단동십훈>은 불아불아(弗亞弗亞), 시상시상(詩想詩想), 도리도리(道理道理), 지암지암(持闇持闇), 곤지곤지(坤地坤地), 섬마섬마(西摩西摩), 업비업비(業非業非), 아함아함(亞合亞合), 짝짝궁짝짝궁(作作弓作作弓), 질라아비 휠휠의(羅呵備 活活議) 등으로 천심을 고스란히 간직한 어린이들에게 동작으로 재롱을 부리게 하는 독특한 교육법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선조들은 아기를 보며 “도리도리 각궁” 즉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문처럼 말해왔을까. 이 안에는 진리를 알아야지만 결국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창조주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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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한편 <단동십훈> 중 하나인 지암지암(持闇持闇)은 두 손을 앞으로 내놓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하는 동작으로, 그윽하고 무궁한 진리는 금방 깨닫거나 알 수 없으니 두고두고 헤아려 깨달으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점심(點心: 선승들이 수도를 하다 시장기가 돌 때 정해진 시간 이외에 아주 조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마음에 점을 찍듯 먹는다는 의미), 주인공(불교에서 득도한 인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자아를 의미함), 찰나(불교에서 최소한의 시간을 일컫는 말), 강당(인도에서 설법을 강(講)하던 장소), 식당(불교에서 음식을 먹으며 불도를 수행하는 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