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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만리 조선 땅 밟은

첫 선교사들


한국 개신교

현실과 마주하다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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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5일 부활절, 세 명의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내렸다.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도착한 ‘아침의 나라, 은둔의 땅 조선’은 이제 개항한 지 2년이 채 안 됐을 때였다. 세 명의 선교사는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던 이곳에 희망의 빛이 내리길 기도했다.

이들은 미국 북감리회에서 파송환 헨리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로회가 파송한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이들의 제물포항(인천항의 옛 이름) 상륙은 우리나라에서의 공식적인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었다. 세 명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디딘 그 자리에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86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졌다.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수도권 전철 1호선을 타고 인천역에서 내려 인천항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종 형태를 한 이 탑은 총 71 높이로 약 50평 면적에 세워졌으며 높이 2.7 의 3인 청동상, 3개의 탑신, 6면의 부조 및 원형의 석조 계단으로 되어 있다. 탑신은 하늘을 향한 형상이며 각 면에는 한국 민중들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탑 중앙에 3인 청동상은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간절히 기도하는 형상이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의 개항장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됐다. 그야말로 서구의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통로였다. 이때 선교의 문도 열리며 처음 입국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일본에 주재하던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언더우드는 곧장 서울로 향했지만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였던 아펜젤러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서울 대신 인천에 1주일간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6월 20일 재입항했다. 이후 7월 19일 서울 진입까지 인천 내리에 초가집을 빌려 38일간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우며 선교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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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망의 빗장을 부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하노니
어둠 속에서 억압받고 있는
이 한국 백성에게 밝은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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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출처:위키백과)
 

같은 해 7월 7일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르며 공식 예배를 드렸고 이때 영향으로 현재 인천에 있는 내리교회가 창립됐다. 이후 서울로 간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 정동에 정동제일교회를 세웠고 신학문에 뜻을 둔 청년을 모아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조선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이다. 그 명맥이 오늘날의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로 이어졌다.

아펜젤러는 189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를 지지하며 민족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17년 동안 활발한 사역을 펼친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성서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44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당시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익사했고 시신을 찾지 못해 현재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아펜젤러보다 먼저 서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1886년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에서 수학,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887년 서울에 한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또 번역과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고 한국에 머문 30년 동안 한국어 자료를 모아 한불사전, 한영사전, 한영문법을 편찬했다. 한국 최초의 보육원 언더우드 학당, 1887년에는 근대적 교육기관인 경신학당을 설립했다. 1915년에는 경신학당을 모태로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 전신)를 설립했고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다 연이은 과로로 인해 병을 얻고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요양했지만 그해 10월 57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한 한국 개신교
미지의 땅에 입을 맞추며 한국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길 바라던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간절한 기도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 선교의 역사. 몸과 마음, 영혼까지 한국에 바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헌신은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의 밑거름이 됐다. 그렇게 한국에 개신교가 전해진 지 약 134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무색하게도 현재 한국 개신교는 종교가 갖춰야 할 희생과 사랑 그리고 도덕적 윤리에서 벗어나 오히려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의 활발한 활동이 교회 부흥의 씨앗이 되었고, 1907년 평양 부흥 운동을 시작으로 한국 개신교는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때 개신교 인구는 1200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기독교 인구는 급감하기 시작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개신교인 수는 967만 명으로 급감했고 현재도 감소추세다. 심지어 ‘안나가’를 거꾸로 한 성서에 등장하는 지명인 ‘가나안’을 빗대어 신앙이 있지만 교회를 등지고 나가지 않는 교인들을 가리키며 ‘가나안 성도’라고 표현하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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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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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탑 안내문
 


이러한 원인 중 하나는 개신교 내에서 행해지는 무책임한 이단 정죄라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뚜렷한 기준도 없이 ‘마녀사냥’을 하듯 이단 정죄를 남발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병폐를 만들고 있다. 호떡 뒤집듯이 어제의 이단이 오늘의 정통이 되는 이상한 모양새다. 20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백석 총회는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에 대해 백석 교단의 교리와 상충해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해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2010년 한기총은 변 목사에 대해 “범 교단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단으로 보기 어렵다” 고 이단을 해제했다.

같은 년도인 예장통합과 합신은 크리스천투데이 설립자 장재형 목사에 대해 이단 요소가 있다며 교류 금지를 선언하는 등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2010년 10월 한기총은 전혀 이단성이 없다고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이후에도 한기총은 ‘류광수 다락방’과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등을 인정했다. 똑같은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 한국교회에서 교단은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단연합기구에서는 이단을 해제하는 해프닝이 계속돼 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했다가 해제하기도 했다. 이처럼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교회들이 한기총에 의해 줄줄이 이단 해제가 됐다.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강제개종교육’이다. 한기총 소속 목사들은 자신들이 이단이라고 지목한 교단에 다닌다는 이유로 가족 뒤에서 법망을 피해 교묘한 방법으로 감금하고 강제로 개종교육을 하고 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2명이 목숨을 잃어 사태의 심각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목회자들의 사기·횡령·배임·성폭력·폭행·살인 등 각종 범죄 행각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 결과 개신교는 교인이 급감한 것은 물론 최하위의 신뢰도를 주는 종교, 가장 부패한 종교집단으로 인식되는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