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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덕과 화평 내려줍서!

부정과 나쁜액은 물리시고

남해안별신굿을 보고

 

글 김소형

사진제공. 김소형・통영 남해안별신굿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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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이 대체 뭣인디?
‘굿’은 우리나라의 전통 무속 제의다. 제의, 즉 신에게 올리는 제사의식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제의를 받을 신(神)이 있어야 하고, 이 신을 믿고 제의를 올리는 신도 그리고 신과 신도의 사이에서 제의를 주관하는 무당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神)은 누구였을까?

인류가 문명을 형성해 살면서 가장 큰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은 ‘자연’이었다. 인간이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연’은 그 신비스러운 위력으로 자연스럽게 신격화되었다. 자연의 힘을 알고 이에 맞서거나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신관이 되었고, 그 신관이 지도자도 겸직하게 되었다. 고대사회는 제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제에게 올리는 의식으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의 제천행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오늘 날처럼 무당이 주재하는 굿으로 의미를 한정해서 생각하자면 신라 2대 남해왕인 ‘차차웅’에 대한 기록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차차웅’은 왕호지만, 방언으로는 무당이란 뜻이다. 남해왕은 시조묘를 세워 친누이 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케 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도 무당이 유리왕의 득병 원인을 알아내고 낫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렇게 삼국시대에도 굿을 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무당이 점을 치고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제의용 방울 등 고고학자료로 출토되는 유물들을 보자면 굿의 역사는 청동기,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사회와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속의 제의인 굿은 서민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신앙형태로 또는 복을 빌고 치병을 하는 무의적 기능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유교국가인 조선도 형식적으로는 유교의 틀을 내세웠으나 민간에서 의식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무속이었다. 유교에 배척된다 하여 무당을 천시하고 세금(무세 巫稅)을 물리기도 했으나, 합법적으로 그들을 인정했고 궁을 출입하는 무당(국무 國
巫)도 따로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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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거제 죽림별신굿(통영 남해안별신굿 보존회 제공)
 

근간까지 무속이 미개한 민간신앙 정도로 대접받게 된데는 일제시대의 민족신앙 말살 정책의 영향이 크다. 굿을 혹세무민의 사이비종교 의식이라 가르쳤고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것, 천한 것이라고 믿게 하여 무당과 굿을 사회에서 몰아냈다. 그 이후의 군사정권에서의 탄압과 멸시도 마찬가지여서 이 당시 무당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있던 굿과 무당은 구석진 시골마을의 당산에 숨어들어 겨우 연명하였다. 이제야 해금이
되어 그간의 멸시했던 시선에서 놓여나 우리 전통문화의 큰 뿌리로 인정받게 되니, 굿을 시연하는 이들도 바라보는 우리도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남해안별신굿 들여다보기
남해안별신굿은 남해안지역에 전승되는 마을굿이다. 경상남도 통영시와 거제도를 중심으로 한산도·사량도·갈도 등의 남해안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다. 어민들의 풍어(豐漁)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의로 보통 2년에 한 번씩 굿을 벌이는데, 주로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에 행해진다고 한다. 별신굿의 ‘별신’은 현지에서 ‘별손·벨손·벨신’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 굿은개(바다)를 먹이는 굿이라고 하고 있다.

다른 수많은 굿과 함께 사라질 위기에 있던 이 남해안별신굿을 되살려낸 이는 11대 세습무인 정영만 씨. 자신의 삼남매를 모두 데리고 굿판에 다시 들어선 정영만 씨는 바닷가 마을을 찾아다니며 굿을 간청하여 사라지는 굿판을 다시 살려나갔다. 자녀와 제자들에게 굿의 법도를 가르쳤고 조상들의 대를 이어 남해안별신굿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해안별신굿이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열정적인 수고와
노력 덕택일 것이다.

남해안별신굿은 세습무들이 행하는 굿이다.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들이 점사(점을 치고 봐주는 행위)를 하고, 신과의 합일상태에서 ‘공수’를 내리는 등으로 굿을 진행하는 데 반해, 세습무들은 신과 무당이 대좌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춤과 노래로 복을 빌기 때문에 동작들이 격렬하지 않고 황홀경으로 유도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기능적으로 완숙한 소리와 춤을 볼 수 있는데, 판소리나 기악 산조, 한국무용 등 우리의 전통예술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세습무들의 이 무당굿이라 할 수 있다.

세습무의 무복도 강신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은데, 특히 손전(가는 대나무 가지에 흰종이를 서너 가닥 묶어 손에 드는 무구)을 들고 화관을 쓴 복색은 바리공주 복색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바리 공주가 남산에 올라가 설법을 할 때 한 손에 새꽃(억새꽃)과 망개나무를 들고 있었다는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바리공주 설화가 남해안별신굿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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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석(통영 남해안별신굿 보존회 제공)
 

다른 굿보다 남해안별신굿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음악이 화려하다는 것. 악사 구성은 삼현육각(피리, 젓대, 해금, 북, 장구)으로 타악, 현악, 관악이 함께 어우러져서 연주되는데 시나위가 주를 이루며 음악적, 선율적으로 뛰어난 음률을 자랑한다. 시나위는 즉흥성이 뛰어난 민속음악으로 타악과 관현악이 어우러져 연주되는 음악이다.

어촌계 사람들이 각 가정에서 제사상을 이고지고 하여 차려낸다는 거리상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보기 힘든 굿판을 공연장에 편안히 앉아서 볼 수 있다는 것만도 어딘가. 보통 어촌마을에서 이런 굿을 할 때에는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7박 8일까지도 한다고 한다. 무당은 여러 명이 번갈아가며 계속 굿을 하고, 어촌주민들은 집에갔다 왔다 하며 즐기는 것이다. 전주소리축제에서는 이를 3시간으로 압축하여 공연하였다. 흥겨웠고 기분 좋
은 축제마당과도 같았던 그 굿판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삼현육각
통영피리 2, 젓대 1, 해금 1, 북 1, 장구 1로 구성되는 악기편성의
총칭으로 때에 따라서는 피리 2, 태평소 1의 편성도 가능하다.


전주에서 베풀어진 남해안별신굿
남해안별신굿은 전주소리축제에서 굿 시리즈의 하나로 시연되었는데, 정영만 문화재를 비롯한 무녀들과 연주자들, 굿 시연자들이 모두 경상남도 통영에서 직접 올라와 굿을 진행하였다. 굿의 진행순서는 ‘거리’들로 이루어진다. ‘거리’란 무당굿의 한 절차를 세는 단위. 탈춤이나 꼭두각시놀음 등의 ‘마당’, 또는 연극의 ‘장(場)’이나 ‘경(景)’에 해당하는 우리말이라 할 수 있다. 거리는 10여 차에서 20여 차로 구성되는데, 일정한 수로 정해져 있지는 않으며 굿의 규모나 목적, 지역이나 무녀에 따라 변동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거리 진행순서는 ① 들 맞이당산굿 ② 부정굿 ③ 가망굿 ④ 선왕굿 ⑤ 제석굿 ⑥ 지동굿 ⑦ 손님풀이 ⑧고금역대 ⑨ 탈놀이 ⑩ 황천문답 ⑪ 군웅굿 ⑫ 시왕탄일 ⑬ 시석의 순서지만, 전주소리축제에서는 부정굿 - 가망제석굿 - 맞이굿 - 승방무 - 수부시나위 - 군웅굿 - 용선놀음 순으로 거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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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베풀어진 남해안별신굿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서천서역
에 다녀와 아버지 오구대왕을
구한 바리공주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병든 이를 치유하는
자로서 무당의 원형이다.


정영만 문화재의 남해안별신굿에 대한 설명이 있은 뒤 본격적으로 굿이 시작되었다. 맨처음은 부정굿으로, 굿을 하는 장소를 깨끗이 정화하여 신을 청하는 굿이다. 무녀가 노란 띠를 두른 부채와 흰 끈을 매달아놓은 대나무가지(손전)를 들고 나와, 자리를 맑히고 소리로 신을 불렀다. 이때 울리는 대금은 신을 청하는 소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어서 가망제석굿이 시연되었다. 가망신은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신이고 제석신은 사람들의 재수, 수명, 다산, 풍요를 기원하는 신이다. 가망신과 제석신은 남해안별신굿에서는 부부신으로 이해되고 있어 이렇게 가망제석굿으로 연행하기도 한다고. 무녀들은 관객들을 굿상 앞으로 불러 앉혀 복과 명을 빌어주고 집안의 화평과 무수대길을 기원해주었다. 몸으로 형태 입고 살면서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굿상 앞에서 절을 하고 축원을 받는 사람들이나 앉아서 보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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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거제 죽림별신굿(통영 남해안별신굿 보존회 제공)
 
가망제석굿에 이어서 연행된 굿은 맞이굿. 진도에서 ‘씻김굿’이라고도 하는 이 맞이굿은 혼백의 길을 닦아주는 씻김의식이다. 기다랗게 맞잡은 하얀 무명천 위에 혼백이 실린 ‘신광주리’가 얹혀 천천히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오갔다. 맞이굿을 주관하는 무녀는 저승신인 바리공주를 대신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서천서역에 다녀와 아버지 오구대왕을 구한 바리공주. 그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병든 이를 치유하는 자로서 무당의 원형이다. 이 맞이굿은 악사들의 삼현육각 가락 속에 엄숙하게 진행되었는데, ‘길닦음’에 대해 가만히 생각게 했던 시간이었다.

혼백이 육신을 벗고 저승으로 향할 때 이렇게 가는 길을 닦아준다면 참 좋을 것이다. 세상에서 고달프고 쓰라렸던 그 어떤 영혼도 평온하게 길을 떠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맞이굿에 이어 승방무와 수부시나위, 군웅굿, 용선놀음이 순서대로 연행되었다. ‘승방’은 남해안의 무당을 일컫는 말인데, 처음에는 불교 의식인 듯이 장삼을 입고 시작하다가 장삼을 벗은 이후부터는 승방(무녀)으로서 본격적인 소리와 음악, 춤이 어우러졌다. 무복 위에 검은색 장삼을 덧입고 흰색고깔을 쓴 복색도 인상적이었지만 엎드리거나 앉아서 또는 서서 도는 춤사위가 무척 독특하여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승방무였다.

‘수부시나위’는 악사들만의 연주로 이루어진 음악이었는데, 각 악기의 특징을 살려 무악(巫樂)만으로 재구성된 시나위를 들을 수 있었다. 수부시나위는 이름 없는 넋들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해준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이어진 군웅굿은 나라에 공로가 있거나 나라를 위해 이름 없이 가신 분의 넋을 기리는 굿이라고. 무녀들은 무대 아래로 내려와 관중석을 돌며 축원을 해주었다.

굿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싶었을 때, 공연장 한쪽에 서 있던 커다란 용선(龍船)이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맞이굿, 승방무와 함께 가장 인상적이었던 용선놀음이었다. 용이 이승에 내려와 모든 액을 거두고 복을 나눠주며 천상으로 인도한다는 굿이다. 용선에 영혼을 싣고 저승세계로 떠나는 것을 놀이와 춤으로 표현했는데, 박진감 넘치는 용선의 춤과 그와 함께 휘돌아가는 무녀의 춤사위가 멋지게 어우러져서 흥겹고 즐거웠다. 객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 용선의 이마에 저승 여비를 꽂아주었다.

“잘 가소, 이승의 애달팠던 일은 다 잊어버 리고 부디 잘 가소!”

소리없는 기도와 축원으로 용선에 꽂힌 꽃을 한 송이씩 가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침내 굿이 끝났다. 정영만 문화재의 구성진 소리와 덕담 그리고 음식 나눔.

마음이 푸근해지는 시간이었다. 무성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늘 허전하게 비어있던 어떤곳이 따스한 동질감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굿을 어찌 오래전의 미개한 전통이라 말할까. 그렇게 말한다면 오히려 그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하나의 뿌리로 연결시켜주는 자랑스럽고 뿌듯한 우리의 전통, 나는 오늘 남해안별신굿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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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뱃놀이
(통영 남해안별신굿 보존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