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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상상이

내일의 현실이 될지니


글, 사진. 김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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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더위에 관한 각종 기록을 한꺼번에 갈아치운 뜨거웠던 열기는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대신 한층 높아진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상쾌함을 선물하고 있다. 지구에 사는 우리가 받는 열은 대부분 태양에서 온다.

태양! 중심온도가 약 1570만℃에 이르고 표면온도는 약 5500℃이며 빛의 속도로 가도 8분 20초가 걸린다는, 지구보다 100배 정도 큰 행성! 고작(?) 40℃도 못 견디는 인간에게 태양의 온도는 상상불가이다. 그런 태양을 ‘만지기 위해’ 미 항공우주국(NASA)의 무인 탐사선 파커가 7년간의 대장정에 올랐다.

우주를 향한 인류의 관심은 줄기차게 이어져서 급기야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는 도전을 시작했다. 제2의 지구라 불리는 화성이 대표적이다. 육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막연히 상상만 하다가 망원경이 발달하고 인공 위성이 나오면서 우주나 다른 별은 실존하는 실체가 되었다.

한편 상상만 하던 것을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서 실체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2월 개봉해 1441만 명을 동원한 <신과 함께1>과 지난달 1일 개봉해서 14일 만에 역시 관객 천 만을 넘긴 <신과 함께2>가 그렇다. 물론 영화 자체가 사후세계(특히 지옥)를 실체(實體)로 만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종 종교의 경서(經書)에서 저승은 똑똑히 언급되어 있고(사후세계를 다루지 않으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시각특수효과(VFX)가 구체화시킨 것이다.

기자 역시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스크린에서 그려지는 7개의 지옥과 이승과 저승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어지는 스토리에 빠져 재미있게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인과 연’이라는 부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연(因緣)은 피천득의 수필에서 보듯 살아있는 사람들의 우연인 듯한 필연적인 만남을 말할 때 쓰는 말로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인연은 이승과 저승을 넘기도 하고, 천년이라는 시간도 넘는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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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는 천년목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이면서 가장 오래 사는 나무 중 하나다.
 

지난 3월호에서 김시습기념관을 다룬 적이있다. 그때는 그가 지은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나오는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중 박생이 꿈속에서 지옥으로 가서 불꽃을 관장하는 염마(燄摩)를 만나는 대목을 소개한 바 있다. 한편 금오신화에는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이생이 담 안의 아가씨를 엿보다)>도 실려 있는데 개성에서 태어나 태학에 다니던 이생이 담장 안의 최씨를 엿보다 둘이 첫눈에 반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결혼했으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부인 최씨가 죽고 이를 불쌍히 여긴 하느님의 허락을 얻어 귀신의 몸으로 남편 이생과 3년을 살다가 저승으로 돌아가고, 이생 역시 병으로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난다는 슬픈이야기다.


도적은 노하여 최씨를 죽이고 난자질하였다.
이생은 거친 들판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얼마 후 도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가 살던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은 이미 전쟁 통에 불타버린 후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씨의 집으로 가 보았더니 행랑채만 덩그러니 남아 황량한 가운데 쥐들이찍찍대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이생은 슬픈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어 작은 누각에 올라가서 눈물을 훔치며 길게 탄식할 뿐이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그는 우두커니 홀로 앉아 지난날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지만 모든 게 한바탕 꿈만 같았다.

이경(二更)쯤 되어 달빛이 희미한 빛을 토하며 들보를 비추었다. 그런데 회랑 끝에서 웬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 부터 들려오더니 차츰 가까워졌다. 발걸음소리가 이생 앞에 이르렀을 때 보니 바로 최씨였다.

이생은 그녀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소?”

최씨는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제 추연(鄒衍)이 피리를 불어 적막한 골짜기에 봄바람을 일으켰으니 저도 천녀(.女)의 혼이 이승으로 돌아왔듯이 이곳으로 돌아 오렵니다. 봉래산에서 십이 년 만에 만나자는 약속을 이미 단단히 맺었고, 취굴(聚窟)에서 삼생(三生)의 향이 그윽이 풍겨 나오니 그동안 오래 떨어져 있던 정을 되살려서 옛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아직도 옛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는 끝까지 잘해 보고 싶어요. 당신도 허락하시는 거지요?”

이생은 기쁘고도 감격하여 말하였다.

“그건 바로 내가 바라던 바요.”

두 사람은 다정하게 마주 앉아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중략>

그 뒤 이생은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씨와 함께 살았다. 목숨을 구하고자 달아났던 종들도 다시 스스로 돌아왔다. 이생은 이때부터 인간사에 게을러져서 비록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에 하례하고 조문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항상 최씨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어느 날 저녁 최씨가 이생에게 말했다.

“세 번이나 좋은 시절을 만났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어그러지기만 하네요.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갑자기 슬픈 이별이 닥쳐오니 말이에요.”

그러고는 마침내 오열하기 시작하였다. 이생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오?”

최씨가 대답하였다.

“저승길의 운수는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또 저희가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지내며 잠시 시름을 잊게 해 주신 것이었어요. 그러나 인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산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중략>

말을 마친 최씨의 자취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생은 그녀의 유골을 거두어 부모님 무덤 곁에 묻어 주었다. 장사를 지낸 뒤 이생도 최씨와의 추억을 생각하다 병을 얻어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마다 애처로워하며 그들의 절의를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시습, <금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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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등록문화재제382호, 면, 180x263㎝)’. 고종이 자신의 외교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에게 1890년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1년 윌리엄 랠스턴 기증했다.

 



우리는 8월 15일 즉 광복절부터 시작해서 18일부터 시작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와 국가대표 선수들의 가슴과 이들을 응원하는 관중석에서 태극기를 많이 보았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정말 아름답고 신비하다. 현존하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고종의 외교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Denny)가 1890년 5월에 미국으로 가면서 가져간 이른바 ‘데니 태극기’라고 한다. 여기에도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태극무늬가 있다.

몇 해 전 갔던 어떤 전시회에서 빨간 곡옥(曲玉, 머리는 굵고 꼬리로 갈수록 가늘어져서 굽은 옥이라고 함)과 파란 곡옥이 어우러져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설명을 본 적이 있다. 곡옥의 유래나 의미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두 개의 곡옥이 서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서 완전한 원(圓)을 이룬다는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것은 바로 불완전한 두 존재가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 한 다는 것이다.

<신과 함께>에서 귀인(貴人)이 있어야 변호를 맡은 삼차사가 환생을 할 수 있고, 귀인 역시 삼차사가 제대로 된 변호를 통해 ‘죄가 없는 존재’임을 밝혀야 환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불완전한 육체는 완전한 영(靈)을 만나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천 년을 넘어 인연이 이어지는 영화 <신과 함께2>를 이야기하다보니 아주 오래된 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떠오른다. 1996년 개봉한이 영화 역시 천 년 전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은행나무인가. 은행나무는 천년목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이면서 가장 오래 사는 나무 중 하나라고 한다. 영원한 세계에 사는 존재들과 얽힌 이야기이니 천 년 정도는 필요하고,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가늠이 안 되는 세월이니 천년목은 돼야 그 사연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게다. 은행나무는 자신이 간직한 사연을 때가 되면 샛노란 은행잎과 함께 사람들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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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9일 오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태권도 남자 개인 품새 결승 경기에서 승리하며 금메달을 차지한 강민성이 태극기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나무가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가을에 은행열매가 익어가면서 시작된다. 웬만한 사람은 참기 힘든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은행 열매가 가진 약효는 이미 널리 알려졌기에 매우 매력적인 약재다.

그런데 은행나무 입장에서 보면 자손을 번식하는 데 위기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고약한 냄새를 풍겨 뭇 생명체들에게 외면 받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들은 1억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지고 있다.

상상은 자유다. 하지만 우리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도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제현실로 말이다. 인류가 그동안 쌓아온 엄청난 양의 지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심해서 상상해야 하겠다.

혹독한 여름을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암울한 지구의 미래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온갖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의 줄기를 바꿔야한다. 올해만 해도 지구 곁을 스쳐간 소행성 숫자가 엄청났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를 향하고 있는 녀석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여태까지 지구가 넘겨온 위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숱한 어려움은 잘 짜인 창조의 질서 덕에 넘어갔다. 그러니 짧은 생각으로 어두운 미래를 생각하지 말자. 만물과 좋은 인연을 맺고 좋은 미래를 생각하자. 오늘의 상상이 내일의 현실이 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