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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는

마녀의 친구?


글. 신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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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력을 지닌 여자’ ‘여자 마귀’ ‘악독한 여자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중세 유럽에는 마녀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초자연적인 마력을 받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악마의 집회에 참석하고 어린아이를 죽여 그 피를 온몸에 바른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마술을 부리는 여자는 살려두면 안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은 일단 이단 심문소에 넘겨 재판을 받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마녀 재판’이다.

처음에 마녀 재판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이단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붙잡아 심문하는 것이었다. 즉 마술을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며 이단으로 심판을 받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1486년 독일의 두 신부 야곱 슈프렌겔과 하인리히 크레멜이 <마녀를 공격하다>라는 책을 공동으로 펴내자 ‘마녀 사냥’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마녀는 마술을 사용할 뿐 아니라 악마와 계약한 사람”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마와 계약한 악마의 하수인을 찾아내어 심문을 했고 그 증거로 악마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자백을 받아내어 마녀로 몰아 처형했다. 마녀 사냥으로 희생당한 여자는 독일에서만 수십만 명이었고 유럽을 통틀어 1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484년에는 교황 이노센트 3세가 “고양이는 악마와 계약한 이교도 동물”이라는 선언을 했다. 이때부터 고양이들도 ‘마녀 사냥’이라는 구실로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중세 유럽에는 고양이가 급속히 불어났다. 각 도시 뒷골목에는 밤마다 떠돌이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렸다.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혼자 사는 외로운 할머니들이었다.

마녀 사냥이 중세 유럽을 휩쓸었을 때 이런 할머니들이 마녀로 몰려 많이 죽었다. 고양이는 마녀의 친구이자 악마의 부하로 여겨져 함께 처형을 당했다.

1618년 영국에서는 여성 두 명이 손수건으로 고양이를 쫓았다는 이유로 붙잡혀 고양이와 같이 불에 타 죽었다. 악마의 부하인 고양이에게 마법의 신호를 보내 의사소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1560년대에 영국의 링컨셔에서는 밤에 마녀들이 검은 고양이로 변장하고 다닌다고 믿었다. 검은 고양이의 모습이 검은 옷을 푹 뒤집어쓴 마녀처럼 보이게 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도 밤에 검은 고양이와 마주치면 마녀와 마주친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때부터 ‘길을 가다가 검은 고양이를 보면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미신까지 생겼다.

검은 고양이를 악마의 세력과 손잡은 사악한 존재로 보아 무슨 재앙을 당할지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 때도 고양이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사람들은 악마가 고양이로 변하여 전염병을 퍼뜨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세 말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고양이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 17세기 초에 프랑스에서는 매달 고양이 수천 마리를 불태워 죽였다. 이 잔인한 고양이 학살극은 1630년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가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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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어떻게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나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사랑과 기쁨의 여신 바스트의 화신으로 믿었기 때문에 고양이가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금했다.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할 정도였다.

장삿속이 밝은 페니키아 인들은 고양이를 보고 군침을 흘렸다. 어느 곳이든 곡식 창고가 쥐로 들끓었기 때문에 쥐를 잡는 고양이를 수출한다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몰래 고양이를 사들여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에 팔아넘겼다. 그리하여 고양이는 남부 유럽,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반도에까지 전해졌다.

기원전 31년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고양이는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로마 군 병사들이 고양이를 짐 속에 넣어 로마 본토는 물론 식민지들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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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도 인간처럼 재판을 받았다?


1522년 프랑스 오탱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해 보리농사를 생쥐들 때문에 망치자 그 지방에 사는 농부들이 생쥐 몇 마리를 법원에 고발했다. 이에 동물 재판을 맡은 종교 재판소에서는 농가에 사람을 보내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생쥐들을 변호할 변호사를 임명했다.

생쥐 측 변호사는 바르톨로메 샤스네라는 사람이었다.

법원에서는 보리농사를 망친 생쥐 몇 마리에게 법정에 나오라는 소환장을 농부들이 사는 마을의 설교단에서 읽혔다. 하지만 생쥐들은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 생쥐 측 변호사가 이런 주장을 했다.

“소환장은 무효입니다. 그 소환장에는 특정의 몇 마리 생쥐만 소환한다고 되어 있는데, 보리농사를 망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지역 교구의 모든 생쥐들을 소환하여 재판을 받게 해야 합니다.”

법원은 생쥐 측 변호사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지역 교구의 모든 생쥐들을 소환한다는 내용의 소환장을 작성하여 그 지역 모든 마을의 설교단에서 읽혔다. 그러나 생쥐들은 여전히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생쥐 측 변호사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생쥐들이 법정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고 측에서 길에 고양이들을 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들이 생쥐들을 절대로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생쥐들이 법정에 올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이들에게 생쥐를 해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재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교묘한 변론으로 생쥐들을 변호한 바르톨로메 샤스네는 이 일로 프랑스에서 제일 인기 있는 변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법을 어긴 동물에 대한 재판은 오랜 옛날부터 행해졌다. 사람들은 동물도 지적인 능력이 있는 만큼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는 민간 재판소나 종교 재판소에서 동물에 대한 재판을 했다.

만약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사람을 죽였다면, 민간 재판소에서 재판을 해 사형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야생 동물에 대한 재판은 종교 재판소가 맡아 사형이나 파문, 추방령 등을 내렸다.

11세기 프랑스 성당에서는 파리들이 날아들어 설교를 방해했다는 죄로 파문을 당했는가 하면, 1394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는 돼지가 어린아이를 죽여서 먹었다는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또한 1519년 북이탈리아의 스텔비오에서는 땅속을 마구 파헤쳐 곡물과 초목을 망쳤다는 죄로 두더지에게 추방령이 내려졌다. 당시 유럽에는 가축・야생 동물뿐 아니라 새나 곤충들까지 재판 절차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동물들은 인간의 법을 어겼다는 죄로 피고석에만 불려 온 건 아니다. 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기도 했다.

17세기 사보이에서는 살인범이 무죄라고 주장해도 하나님은 무죄 판결이 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믿었다. 만약 살인 현장에 동물이 있었다면 동물에게 말하는 능력을 주어 반박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살인 사건 법정에는 사건을 목격한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을 증인으로 데려왔다. 이때 동물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무죄로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과연 살인범의 죄를 증언한 동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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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물도 인간처럼 재판을 받았다면서요?”

1591년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황제 이반 2세의 아들 드미트리가 유클리치로 유배를 왔는데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 도시에 있는 큰 종이 울린 것이었다.

종은 곧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감형되어 종은 시베리아의 교회 종탑에 걸렸고, 1892년에는 완전 사면되어 유클리치로 돌아왔다고 한다.

고대 아테네 때도 무생물은 인간처럼 재판을 받았다. 특히 살인죄를 저지른 물건은 체포하여, 군중 앞에서 재판을 열어 아테네 밖으로 추방해 버렸다.

중국의 어느 고을에서는 목조상 열다섯 개가 고위 군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고을을 다스리는 태수는 목조상을 잡아들여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했고, 머리를 잘라 연못에 처넣으라는 판결을 내렸다.

옛날에는 사람도 동물도 아닌 무생물에 대해 이렇게 재판을 열어 처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