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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상징

명동성당


글.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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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명동. 고층 빌딩과 오가는 인파들로 붐비는 이곳에 한국 천주교회의 본산이자 상징인 ‘명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은 종교적·건축적 가치와 함께 우리 현대사가 요동치던 고비마다 지성과 양심의 보루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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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내부 전경, 성모마리아상
 

명동 언덕‘명례방’
성당이 있는 명동 언덕은 한국 천주교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명례방’이라 불렸던 곳으로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예식이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김범우 토마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예절을 드렸다. 포도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했지만 중인 계급이었던 김범우는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이후 프랑스와의 수교가 체결된 해인 1886년부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나서 새로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 ‘명동성당’이다.

종교적·미술적 가치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딕 양식 건축물(사적 제258호)이다. 기공후 12년 만에 완공된 만큼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했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1898년 완성했다. 성당 건물 총 길이는 68.25m, 폭 29.02m, 건물 높이 23.43m이며 십자가를 제외한 종탑 높이 46.07m의 웅장한 규모로 공사비 6만 달러가 투입된 대공사였다. 구조적·양식적으로 약현성당과 유사한 편이다. 현재 이 일대에는 성당 건물뿐 아니라 성당을 중심으로 여학교와 가톨릭회관(전 성모병원)·주교관·사제관·수녀원·문화관·교육관·별관이 20여 종의 벽돌과 붉은색과 화강석을 이용한 프랑스 고딕풍으로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대성전 건물 외관은 장식적 요소가 배제된 순수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아치형 복도, 스테인드글라스가 외부와는 다른 분위기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 성탄과 삼왕 경배, 예수와 12사도 등 성서의 내용이 표현돼 있어 엄숙하고 경건한 느낌을 준다. 곳곳의 제대, 성화, 성상 등 종교 예술품들은 명동성당의 종교적·미술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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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제대 하부에는 지하 성당이 있다. 이곳은 미사 장소와 성해 안치실로 쓰이고 있어 지하묘역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처음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고 1984년 시성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5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의 푸르티에 신부 및 프티니콜라 신부의 유해와 1839년 순교한 무명 순교자 2인의 유해도 모셨다. 신도들은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민주화 성지’
근현대에 들어서 명동성당이 겪은 풍랑은 엄청났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사회참여에 대한 명동성당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1965년 막을 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전례와 신앙생활을 쇄신할 것을 교회 바깥으로는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세상에 열린 교회가 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명동성당은 1970년대 들어‘민주화성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된 이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수많은 민주화 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1976년 명동 3·1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 재야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3월 1일 3·1절 기념미사와 가톨릭·개신교 합동 기도회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던 이 사건은 이후 재야 운동의 구심점이 된 것은 물론 1970년대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토대가 됐다.

가톨릭 문화의 향기
교회와 세상을 잇고자 명동성당은 문화의 광장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명동성당은 2002년 문화관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첨단 시설의 공연장 꼬스트홀을 탄생시켰다. 꼬스트 홀은 다양한 음악회를 비롯한 각종 공연으로 명동을 찾는 이들에게 가톨릭 문화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지난 2012년 명동성당은 1898년 축성된 성당을 보존하고 신자와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 세상과의 소통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취지로 종합계획 1단계 공사를 시작했다. 2014년 마무리된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공사로 성당 진입부에는 광장이 조성됐고, 명동성당 초창기 시절의 경사로가 복원됐다. 지하 1898광장에는 서점과 다양한 카페, 식당들이 들어서 명동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1898광장 내‘갤러리 1898’은 교회 안팎의 예술가들에게 회화와 조각,서예 등 다양한 장르의 성미술품과 작품을 일반인들에게 선보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