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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너머 만나는

미륵의 세상

충주 미륵대원지


글. 이지수



미륵은 곧 미래불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현세의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하고 난 뒤 5억 6천만 년 뒤에 온다는 구원의 부처다. ‘그분이 오시면’ 낡은 세상이 가고 새 세상, 즉 정토(淨土, 깨달음의 세계)가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그토록 미륵불을 찾았던가. 천년의 세월동안 변하지 않는 미소를 간직한 미륵불이 있는 곳이 있다.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전설을 품은 ‘충주 미륵대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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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156년) 여름 3월, 서리가 내렸다.
(같은 달에) 계립령(鷄立嶺) 길을 열었다.


하늘길이 열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라 8대왕 아달라이사금(재위 154~184년) 때 기록한 한 구절이다.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보면 ‘개계립령로(開鷄立嶺路)’이니, 없던 길을 뚫었다는 뜻이다. 신라가 험준한 소백산맥에 막힌 한반도 중부로 통하는 길을 연 것이다. 지금은 ‘하늘재’라 불린다. 얼마나 험준한 길이었기에 이렇게 부를까.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재’란 의미로 조선시대 붙여진 이름이지만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이 사금왕이 중원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개척한 고개다. 이 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긴 백두대간 고갯길이란 점에서도 아주 큰 의미가 있다. 고구려 온달 장군이 이 땅을 회복하러나섰다 전사한 유서 깊은 길이기도 하다.

계립령 길에 휴게소가 있었다. 길손들이 쉬어가는 휴게소였던 숙박시설이자 사찰, 바로 미륵대원(彌勒大院)이다. 미륵이라는 말로 보아 사찰이기도 했으며 큰 집이라는 대원(大院)을 붙였으니 숙박시설이기도 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1970년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에 대원사(大院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미륵대원으로 불리고 있다. 미륵대원지는 신라 마의태자 창건설, 고려 태조 왕건 창건설, 고려 초 왕실의 외척이던 충주 유씨(劉氏)의 창건설 등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마의태자 창건설이다.

천년 세월의 자태
하늘재는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두 마을의 이름이 재밌다. 관음리와 미륵리다. 현세와 내세의 갈림길을 의미하는 듯하다. 마을 한곳에 관음사가 있고 반대편엔 미륵사가 있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통일신라가 문을 닫고 고려시대가 열리면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이 현세와 내세의 갈림길 고개를 넘어 미륵리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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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석탑 (충주시청 문화예술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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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충주시청 문화예술과 제공), 하늘재
 


마의태자는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신라 부흥의 꿈을 안고 떠나던 중 문경 마성면의 계곡 깊은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그날 밤 마의태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꿨다. 관음보살이 왕자에게“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우고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포덕함을 잊지 말아라”고 말했다.

마의태자의 신기한 꿈은 놀랍게도 같은 시간에 공주도 꿈을 꾸었고 두 남매는 다음날 서쪽을 향해 고개(계립령)를 넘어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석불입상을 세우고 별빛을 받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했다. 이것이 미륵사(미륵대원지)와 덕주사다.

미륵대원지 입구에는 깨어진 당간지주가 있고 그 뒤로 돌거북과 석등(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오층석탑(보물 제95호) 그리고 미륵불(보물 제96호)과 법당 터가 일직선으로 정연하게 배열돼 있다. 천년 세월을 버티며 꿋꿋이 서 있어 미륵대원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오층탑은 일반적인 탑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자연석으로 된 탑의 맨 아래 기단부에서부터 몸통인 탑신부를 거쳐 꼭대기인 상륜부까지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둔중하다. 팔각 석등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보는 이로 하여금 차분하게 한다.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얹어놔 아름다움을 뽐낸다. 팔각 석등과 오층석탑 바로 인근에는 자연 암반 위에 지름 1m쯤 되는 둥근 바위가 올려져 있다. 바위가 거북처럼 생겼다고 해서 거북바위로도 불린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시절 신라군과 격전을 벌이던 온달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주변에 힘자랑을 하기 위해 이 둥근 바위를 들어 올리곤 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온달 장군 공깃돌이라고도 불린다.

대지는 낮은 계단식으로 나뉘어 있는데 단 위에는 중문과 행랑들을 세워 영역을 분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동원의 서쪽으로는 개울이, 동쪽으로는 한두 단 높게 쌓은 건물터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미륵대불은 높이가 10.6m로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석굴 한가운데 세웠다. 석굴암과 비견될 정도로 장대하다. 정식명칭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커다란 돌덩이 네 개로 몸을 만들고 갓과 좌대는 다른 돌을 썼다.

꿈꾸듯 서 있는 미륵불
미륵대원지는 화려했던 옛 영광을 뒤로 한 채 절터만 무심히 남아있을 뿐이다. 미륵의 사원을 지으며 마의태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현세에서 좌절된 꿈을 내세에서라도 이루길 바랐던 것일까.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달음질치던 심연의 나약함은 결국 미륵의 세계로 발길을 닿게 한다. 천 년 풍상에 시달렸지만 미륵불의 둥근 얼굴에 둥근 눈썹, 원통형 몸돌이 착한 이미지를 풍긴다. 유난히 흰 얼굴이 유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순진한 눈빛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패망한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전설이 스며서일까. 슬픈 기색도 역력하다. 망국의 왕자로 무엇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날들이었기에 더욱 간절히 재건을 꿈꾸며 이상향을 소원했을 것이다. 월악산자락에 있는 미륵 세상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던 꿈의 공간이다. 천년 세월에 고색창연한 사찰은 사라졌지만 미륵대원지에 미륵불은 꿈을 꾸듯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