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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글. 이지수


‘마녀사냥’이란 말을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흔히 대중 안에서 근거 없는 말로 죄 없는 사람을 죄인처럼 몰고 갈 때 쓰는 말이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기독교를 절대화해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시행된 것이 바로 마녀사냥. 당시 사람들은 광신도적으로 변해 이도교의 사람들이나 여러 죄 없는 사람들을 악마나 마녀로 몰아 잔인한 고문과 사형을 자행했는데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됐다. 마녀사냥과 떼려야 뗄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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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신교의 탄생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 16세기 무렵, 중세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가톨릭교회의 부패가 심각해지자 교회를 개혁하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교회의 ‘면죄부’ 판매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비텐베르크(성 베드로) 대성당을 고쳐 지을 계획을 세우고 각 지역의 신부들에게 헌금을 걷어오라고 했다. 이 돈을 모으기 위해 독일에서는 ‘면죄부’를 팔았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면죄부를 사면 성모 마리아를 범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신학 대학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면죄부에 반대하는 이유 95가지를 적은 일명 <95개조 의견서>를 내걸게 됐다. 그는 오직 성경에 따른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반박문은 4주 만에 전 유럽에 퍼졌고 황제와 사이가 나쁜 제후들, 가난한 농민들이 루터파 신교도가 됐다. 루터파 신교는 오랜 싸움 끝에 1555년 정식 종교로 인정받았다. 이것이 개신교의 시작이다.

절대 예정론을 주장한 칼뱅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루터와 함께 거론되는 사람이 칼뱅(칼빈)이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신교를 떼어냈다면 칼뱅은 종교개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기 전에 그것을 붙잡아 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개신교 장로교가 칼뱅을 계승한 교파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획일적 교조주의에 반발한 종교개혁은 성경 해석 등 종교문제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루터가 말한 ‘그리
스도의 자유’가 바로 그것다.

그러나 자유를 빌미로 다른 주장들이 싹터 나오자 칼뱅은 새로운 교리의 핵심을 하나의 도식으로 집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기독교강요(1535)>를 출간해 개신교 교리의 기반을 닦았다. 1536년 9월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설교자로 초빙된 칼뱅은 석 달 만에 개신교의 기본원칙들을 요약한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하고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칼뱅의 요구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아무리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 계속 살 수 없었다. 민주적인 공화국은 신정적(神政的) 독재국가가 되고 말았다.

칼뱅이 주장한 것은 ‘절대 예정론’이었다. 예정론은 인간이 죽은 후에 구원을 받는 것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고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해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골자다. 그렇다면 개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칼뱅은 자신의 구원이 예정돼 있는지 아닌지는 교회의 성직자도, 부모님도 알지 못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부자가 됐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의 증거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물질에서도 축복을 받는다는 ‘직업 소명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19장 24절에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기록된 것과는 모순되는 듯 하지만 이러한 논리로 돈을 버는 데 열중했던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은 칼뱅의 생각에 힘을 얻고 그를 추종했다. 칼뱅파가 주로 대서양 연안의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를 바탕으로 칼뱅의 종교개혁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각 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칼뱅의 잔혹사, 마녀사냥
칼뱅과 그의 지지자들은 칼뱅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고 처형했다. 이는 칼뱅에 대해 오늘날 제네바의 독재자, 학살자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는 일명 ‘마녀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종교법원을 주관하면서 4년 동안 무려 58명을 사형하고 76명이나 추방했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 인구가 1만 6000명 미만이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그들은 “이 부패한 도시에 실질적인 도덕과 규율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700~800명을 처형할 교수대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심지어 칼뱅은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칼뱅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했던 에스파냐 신학자 ‘세르베투스(1511~1553)’를 두고 “그 자가 제네바에 나타나기만 하면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고 작심했었다. 결국 칼뱅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힌 세르베투스는 “벼룩이 나를 산 채로 물어뜯어 죽이고 있다. 신발은 다 망가졌고 옷도 내복도 없다. 나의 배설 물조차 치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잔혹한 짓이다!”라고 절규했다. 그는 무려 2개월 13일 동안이나 인간 이하의 동물적 학대와 고문를 받았으나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키다가 화형대에서 죽었다. 세르베투스 처형은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다.

이는 개신교 본래의 이념을 부정한 사건이었다. ‘이단자’란 개념자체는 개신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본래 개신교는 성경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독점적 해석권을 부인하고 모든 사람에게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하자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법이나 전통이 아닌 성경과 자신의 교회론을 근거해 성경 해석 독점권을 비판했고, 신앙·이성·성경·성령을 소유한 모든 신자들이 동일한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칼뱅 자신도 <기도교 강요>에서 ‘이단자를 죽이는 것은 범죄행위다. 쇠와 불로 그들을 파멸시키는 것은 인문주의의 모든 원칙을 부인하는 행동이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이 부분은 칼뱅이 권력을 장악한 후 삭제됐다.

칼뱅의 마녀사냥은 가톨릭과 같은 전형적인 이단재판, 종교재판으로 자신의 교리를 비판하거나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다. 여기엔 아이들, 노인도 예외가 없었다. 처형방식도 종교인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

자녀들에게 유아세례 주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80세 노인과 그의 딸을 무참하게 처형하고 어떤 소녀가 부모를 구타했을 때에는 목을 잘랐다. 주일예배를 몇 번 불참했다거나, 춤을 추었다거나, 술을 마셨다거나 하는 이유로도 가차 없이 투옥됐다.

단순히 ‘혐의’만 받고 잡혀온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고문이 행해졌다. 극심한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실로 다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미리 목숨을 끊기도 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자주 빈발하자 나중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시의회는 “죄수들은 밤낮으로 손뼉을 치라”는 규정까지 만들어야만 했다.

고문들을 대략 열거하면,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지지는 고문, 천장에 도르레를 달아 놓고 공중에 매다는 고문, 사람들의 배를 가르고 꼬챙이로 쑤시는 고문, 신체의 일부분을 절단하는 고문, 발가벗긴 채 밧줄로 묶고 물속에 넣어 죽이는 고문, 사람의 가죽을 벗겨낸 후 소금으로 문지르는 고문 등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단심문소’에서 행했던 악마적 만행을 칼뱅은 거의 그대로 재연했다.

칼뱅을 계승한 장로교
종교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 신자들을 두고 종교의 몰입도가 높아질수록 타 종교에 대한 관용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오늘날 ‘마녀사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칼뱅주의를 뿌리로 두고 있는 장로교는 무분별한 이단 정죄로 수백개의 교단과 교파로 갈라졌고 이로 인해 교인수가 급감하게 됐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사랑과 섬김의 본이 돼야 할 종교인이 자신들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심지어 사람까지 죽이는 모습에서 칼뱅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