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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푸른 눈의 의사


우리나라 최초 성공회 성당 인천 내동교회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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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의 문이 열렸다. 일본의 무력 행위에 굴복해 반강제적으로 맺어진 불평등한‘늑약’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은 세계사의 흐름에 합류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됐다. 조선은 부산, 원산, 인천 3개 항을 개항했고 그 곳을 통해 일본과 미국, 유럽, 러시아, 청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왔다. 이 흐름을 타고 1890년 영국 해군 군종 사제 존코프(Charlew J. Corfe, 1943~1921)주교와 의사 엘리 랜디스(Eli B.Landis, 1865~1898) 등 선교사 6명이 인천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조선선교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내동교회’를 인천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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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과 붉은 벽돌의 앙상블
인천 신포시장 공영주차장을 등지고 ‘내동’ 방향으로 가파른 비탈 길을 오르고 오르다 보면 뾰족한 첨탑 끝에 작은 십자가가 서 있는 아담한 건물이 등장한다. 언젠가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본 듯한 풍경이다. 짙은 밤색 아치형 문을 열면 꼽추 ‘콰지모도’가 반쯤 부은 눈으로 나와 씨익~ 웃음을 보일 것만 같다. ‘대 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의 첫인상은 그랬다.

내동교회 건물 형태는 지붕의 목조트러스를 제외하고 외벽과 주요 부재는 화강암이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특히 붉은 벽돌 비워(영롱) 쌓기로 쌓아 올린 외벽의 입체감과 빈 부분이 그대로 내부에 투영되도록 했다. 이는 교회건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빛에 의한 효과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다. 건물 양 벽에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벽의 중간 부분은 여러 개의 십자가 문양이 공간으로 수놓아져 있다. 이곳을 통해 빛이 들어올 경우 안에서는 수십, 수백 개의 ‘빛십자가’를 맞으며 종교의식을 치를 수 있다.

교회 건물 전체가 회색의 화강암과 붉은 벽돌의 앙상블이다. 내동 교회는 1902년 한 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1904년 성공회 신학원으로 1956년까지 운영됐다. 당초 건물은 6·25전쟁 때 소실됐으나 1956년 6월 23일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 입구 화단 위에 흉상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왼편은 코프 주교, 오른편은 랜디스 박사다.

영국 해군 군종 사제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와 의사 랜디스(한국명, 남득시) 등 선교사 6명은 1890년 9월 29일 내동교회를 건축한 후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인천 개항기 시절, 외국인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당시 인천은 인구의 40%가 외국인이었다. 10명 중 4명이 외국인이었던 셈이다. 인천에서 살며 자신들의 이상을 실천했던 외국인들, 그들 중 상당수가 인천에서 사망했다. 그들은 죽은 후에도 우리나라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졌다. 이곳에 자신의 삶에 관한 족적을 남겼다. 그들의 이야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될 정도로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

인천 최초 서양식 병원
지난해 9월 초. 인천 연수구 청학동에 위치한 외국인 묘 66기를 인천 가족공원으로 이장하는 작업 도중 한 미국인의 묘에서 성인 손가락만 한 크기의 작은 십자가가 발견됐다. 이 십자가의 주인공은 인천 개항 당시 한국을 찾아 의료봉사를 하다 숨진 미국인 의료 선교사 랜디스 박사다. 다른 종교와 달리 성공회는 그 나라 사정에 맞춘 토착화 선교 활동을 했고 교육과 의료 봉사 활동에 주력했다.

코프 주교는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지방 등을 돌아다니며 전도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천과 여주, 진천 등지까지 손을 뻗쳐 병원을 설립하고 각지에 학교를 설립했다.

특히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출신으로 코프 주교와 함께 들어온 랜디스 박사의 선행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지금의 내동교회 자리에 조선식 온돌이 있는 ‘성누가 병원’을 세우고 열성적으로 사람들을 진료했다.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낙선시(樂善施, 선행함으로써 기쁨을 준다)’라는 병원 이름을 직접 작명하기도 했다. 당시 주민들은 이 병원을 ‘약대인 병원’이라고 불렀다. 서양 약을 가지고 치료하는 의사를 이르는 말이다. ‘약대인’이란 단어에는 젊은 나이의 노란 머리 외국인이 낯선 조선 땅에 들어와 의술을 베풀었던 랜디스 박사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담겨 있다. 그는 1892년 3594명의 환자(한국인 3076명, 중국인 385명, 일본인 130명 등)를 진료, 왕진했다. 1894년에는 4464명의 신규 외래환자를 진료했다. 랜디스의 삶에 대해 코프 주교는 1891년 어느 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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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동교회 랜디스 기념비 2. 코프주교와 랜디스의 흉상 3. 영국병원(성 누가병원) 표지석
 



“다른 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랜디스가 오늘 한 일들을 기록해 본다면 환자들이 아침 7시부터 오기 시작해 오전 11시 30분까지 35명의 외래 환자를 진료했다. 그리고 그는 입원환자를 돌보고 점심 식사 후 바로 더 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그중에는 인천에 있는 중요한 관리들도 있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영어학교에서 강의하고 그 후에 한 사람의 응급환자를 치료하고 8시 30분에야 저녁 식사를 했다.”

이 병원은 인천의 첫 서양식 병원으로 성공회 중심의 의료선교 공동체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선교본부의 지원금 부족해지면서 1917년 6월, 26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교회를 지은 것이 지금의 내동교회다. 랜디스는 인천에 최초의 병원 부속 고아원도 설립했다. 1892년 1월부터 새로 지은 한옥을 구입해 6살 고아를 양자로 삼아 돌보기 시작했다.

이 고아의 어머니는 랜디스에게 치료를 받던 환자였는데 죽기 전에 그 아이를 위탁했고 이것이 그가 설립한 고아원의 효시가 됐다. 사람들은 그가 머물던 인천 응봉산 자락을 ‘약대인산(약대이산)’이라고 했다. 체구가 작아 ‘리틀 닥터’로 불린 랜디스. 한국말도 유창하게 잘 했다. 한문을 깨우쳤기에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의 고전과 한국의 한문 서적을 탐구했다. 한국에 관한 문헌 수집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랜디스 문고’로 남겼다. 그가 당시 수집하고 집필한 300여 권의 책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의 추모사를 보면 “그는 한국 한문학의 끈질긴 연구자이기도 했다. 수많은 저녁에 병원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가 한국식으로 맹자 또는 논어를 읽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송림동 한옥에서 입양한 고아들과 살다가 장티푸스로 1898년 4월 사망했다. 그의 나이 젊디젊은 33세였다. 랜디스는 인천 외국인 묘지(제27호)에 안장됐다. 우뚝 솟은 켈트 십자가가 세워진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천지역 성공회 개척의 발판을 다지고 사회 선교에 헌신한 랜디스 박사의 큰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봉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