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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역사 속

어느 목사의 죽음


대정교회


글, 사진. 이지수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아름다운 섬 제주. 그곳에 한국 기독교사에 의미 있는 성지가 있다. 제주 출신 1호 목사이자 4·3사건 때 희생된 이도종 목사의 유해와 기념비가 봉안된 ‘대정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제주도는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대한민국의 평화를 상징하는 섬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과거에는 외딴 유배지였고 대한민국 이 갓 태동한 시기 4·3사태를 겪는 등 슬픈 역사를 적잖이 간직한 곳이다. 그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이도종(1892~1948) 목사다. 그의 신앙의 숨결이 묻어난 대정교회는 기독교 제주 3대 성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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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 돌로 새긴 이도종 목사 순교 기념비
 
 


한 폭의 그림 같은 교회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유배지 인근에 있는 대정교회.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와 거처하던 초가가 교회 바로 옆이다. 이곳 도롯가에 낮게 쌓인 현무암 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순교자 이도종 목사 성지’라고 씌어 있는 대정교회 입구에 다다른다. 층층이 정교하게 쌓인 돌담 사이로 들어가면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 연한 황금색 교회건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시야에 펼쳐진다. 어디에선가 잔잔히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은 서정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둥그런 돌담 동선을 따라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있는 2m 높이의 십자가와 예전에 울렸을 40년 된 종탑의 종이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특히 대정교회에는 우리나라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이도종 목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기 위한 순교 기념비가 있다. 교회 앞마당에 기념비가 있고 그 안에 이 목사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기념비는 산방산에서 캔 돌로 만들었다. 산방산은 대정교회에서 4㎞ 남짓 떨어진 종상화산(鐘狀火山)이다. 1957년 4월 24일 대정교회 교인들은 이도종 목사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직접 산방산 돌을 캐어 운반하고 그 돌에 글을 새겨 교회 마당에 기념비를 세웠다. 교인들이 산방산 돌을 캔 이유는 제주의 돌은 화산섬의 특성상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지만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산방산 지질만이 단단한 안산암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목사의 삶은 잔혹했던 제주도의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제주 애월 출신 청년

일제 치하 제주 애월 출신으로 평양까지 유학을 갔던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이도종. 미처 졸업은 하지 못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이 목사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조봉호 전도사의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이 짤막하게 있을 뿐 그의 자녀에게도 독립운동 내막을 알리지 않아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의 나이 19세 때 운명을 바꾼 한 사람을 만났다. 제주도에 첫 선교사로 부임해 첫 교회를 세운 이기풍 목사였다. 당시 제주는 육지와 다른 이방 지대였다. 풍속과 말도 달랐고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도 높았다. 그러한 곳에서 이기풍 목사를 환영할 리는 없었다. 문전 박대 당하고 몰매를 맞기도 했지만 13년간 제주도에서 성내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5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도종 목사는 이러한 이기풍 목사의 열정적인 목회 활동에 감화를 받아 신앙의 길로 접어들었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6년 34세 나이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 목사는 전북 김제의 농촌지역에서 목회자로서 첫발을 내디뎠고 1928년 김제중앙교회를 설립했으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은 기독교가 황국신민화 정책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예배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 목사가 일본에 대해 남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 일제는 그를 주요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유지의 결혼식에서 축사하던 중, 당시 시국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갔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김제중앙교회 담임을 사임하고 제주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 그의 앞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사건이 놓여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사역은 어이없게도 해방이 된 후 제주 4·3사건으로 멈추고 말았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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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도종 목사 성지에 대한 설명이 적힌 팻말 2. 대정교회 입구 3. 대정교회 내부 4. 대정교회 옛 십자가
 



비극적 역사 제주 4·3사건

1948년 4월 3일부터 무려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에서는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로 주민 3만 명이 희생되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제주 4·3사건이다. 아름다운 제주가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비극적 사건은 1947년 제주 경찰이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쏜 것이 원인이었다. 3·1절 기념식에서 기마 경관의 말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고 군중들이 경찰서에 가서 항의하자 경찰이 총을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희생자 중에는 초등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성도 있었다. 이때까지 미 군정을 등에 업고 친일 경찰이 무력으로 양민을 탄압하고 폭행하다 이 일이 큰 계기가 돼 4·3사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교회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토벌대의 중심을 이룬 ‘서북청년단’ 등이 외지인들인 데다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무장대들이 교회를 상대로 복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산교회 담임으로 있던 이도종 목사는 화순교회, 대정교회 등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주변의 만류와 신변의 위험을 무릎 쓰고 교회들을 오가며 예배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사태가 심화되던 1948년 6월, 이도종 목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순회 목회차 자전거에 올라타 교우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교우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을 향해 “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고 소리치는 무장 폭도에게 붙잡혀 무장대를 위한 기도를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다른 10여 명과 함께 생매장 당했다.

대정교회 신도들은 이 목사의 시신을 꺼내 장시를 지냈고 그 위에 기념비를 세웠다. 현장에 있던 무장대 일원의 훗날 고백으로 56세에 생을 마감한 이 목사의 최후가 세상에 알려졌다. 제주 방방곡곡을 누비며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 당함으로써 한 알의 밀알이 된 제주도 출신 1호 목사 이도종. 대정교회에는 슬픈 우리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그의 헌신과 순교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