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기꺼이
그 길을 가리라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글, 사진. 이지수

01.jpg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한 젊은이가 12명의 회자수(사형수의 목을 자르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다. 회자수들은 그를 가운데 두고 칼을 이리 저리 흔들며 싸움을 하듯 빙빙 돈다. 첫 번째 회자수가 그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여덟 번째 칼날에서야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스물여섯 해의 짧은 생애를 불꽃같이 살다간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는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제생활 1년 1개월 만이었다. 새남터 성지에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에 한없이 충실했던 한 청년 사제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삶을 느끼고 본받기 위한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02.jpg
 

피의 성지 새남터
‘새남터’는 이곳이 북쪽 한강 변의 노들나루 터 인근에 있는 얕은 모래 언덕이라 억새와 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이 무예를 단련하는 연무장과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됐다. 1456년 사육신이 이곳에서 목이 잘렸고 1468년 남이 장군도 여기서 최후를 맞았다. 특히 천주교 순교자들의 숱한 피가 새남터의 모래톱을 적셨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주로 평신도들을 처형했다면 이곳에선 성직자나 지도층 신자들의 처형이 이뤄졌다.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의 첫 순교자가 됐고 기해박해 때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순교했다.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처형을 당했으며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되어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새남터는 ‘피의 성지’로 불릴 만큼 많은 천주교 성직자들이 참수당한 사형 집행장이었다.

한옥을 연상시키는 외관
새남터 순교성지에는 새남터 기념성당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1987년 완공된 성당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위에 3층 탑을 쌓은 특이한 모양으로 한옥을 연상시킨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성당 입구에는 한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 김대건 신부 동상이 있다. 내부 역시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분위기다. 2층에 있는 성전 천장도 나무로 지은 한옥처럼 꾸몄다. 2006년 별도로 마련된 새남터 기념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우리나라 천주교회가 어떻게 창설됐으며 어떤 박해를 받아왔는지에 대한 내용이 엄숙하게 전시돼 있어 한국 천주교 역사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기념관에는 천주교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성직자 14인의 동판화와 함께 이들의 유해를 모신 성인 유해실, 박해 당시 고문과 처형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당시 사용했던 형구 등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스러져간 순교자들의 정신이 성지 곳곳에 베어 있다. 전시된 그들의 유품과 유해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조선 땅을 밟으러 가는 프랑스 외방 전 교회 수사들(선교사들)의 당시 기분이 어땠을까. 자신들의 선교 사명이 곧 순교로 이어짐을 분명 알고 떠나왔을 터. 그들의 심정은 당시 그들이 남긴 편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전교 지방으로 오기 전부터 천주를 위해 조만간 어떤 괴로움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교구장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나를 부르셨을 때는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새남터 순교자 샤스탕 신부가 조선 교우들을 살리기 위해 자수하기 직전 프랑스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예수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따르던 그들의 마음은 진정 기뻤으리라. 그러나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당히 조선으로 입국한 그들의 정신에 살짝 목이 메어왔다. 그리고 그 현장에 그들과 함께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그가 순교한 곳이기에 새남터 성지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곳이다.

천주를 위해 택한 죽음의 길
1846년 6월 5일 황해도 작은 섬마을인 순위도 등산 나루. 밤새 대지를 탐한 해무가 채 증발하지도 않은 이른 아침, 대지의 나른함을 깨우는 날카로운 소리가 포구에 울려 퍼졌다. 나루 옆 주막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맨발로 뛰쳐나와 보니 말쑥한 양반 차림의 한 청년과 포졸들이 때아닌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포졸들은 “조선 해안에서 어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중국 어선들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징발하겠다”며 위협했고 청년은 “한양에서 순위도까지 몇 차례 왕래했지만 이런 법은 없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저항이 거세자 포졸들은 호패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불심검문이었다. 호패를 차지 않았던 청년이 불응하자 포졸들은 청년과 뱃사람들을 포박해 등산 진영으로 끌고 갔다. 이 청년이 바로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다.


03.jpg
 

그는 프랑스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 일의 하나로 1846년 5월 16일 황해도에서 중국 배에 편지와 조선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이날 체포된 것이다. 체포된 지 10일이 되던 날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옥을 거쳐 6월 21일 서울로 압송됐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대건 일행이 압송되는 동안 김 신부가 중국 배에 부탁한 편지와 조선 지도를 집요하게 찾아내 조정에 보냈다. 김 신부는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았다. “사학죄인(邪學罪人) 김대건응 효수(梟首)토록 하라.” 헌종실록 제13권은 김대건 신부에 대한 1846년 7월 25일의 최종판결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해 9월 15일 헌종은 집행명령을 내린다.

선고 다음 날인 9월 16일 아침 새남터 처형장. 회자수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원을 만든 후 그 안에 김 신부를 밀어 넣었다. 그들은 김 신부의 속바지까지 벗기고 양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횟가루를 뿌렸다.

이어 2명의 회자수가 김 신부의 겨드랑이에 몽둥이를 꿰고 그를 어깨에 멘채 원둘레로 3바퀴를 돌며 그에게 갖은 희롱과 모욕을 주었다. 이어 그의 무릎을 꿇리고 두 귀를 접어 화살을 뚫어 꽂았다. 그런 다음 그의 머리채를 모래사장에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끌어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했다. 12명의 회자수는 그의 목을 차례로 내리쳤고 8번째 칼에서야 김 신부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 직후 새남터 모래톱에 매장됐다. 순교한 지 40여일 지난 10월 26일에 8명의 신자가 상여를 이용해 김 신부의 시신을 운구해 미리내(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정식으로 매장했다.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자신의 모든 것, 목숨을 희생하면서 불모지와 같던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자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그는 조선 복음화의 선구자이자 선각자로 기억되고 있다. 새남터에서 참수되기 전 김대건 신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늘날 많은 신자의 가슴을 울린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