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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낮은 자를
높이 세우다

승동교회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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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풍의 고풍스러운 외관
종로 탑골공원을 지나 관광객들이 붐비는 인사동 거리. 그곳 초입에서 왼쪽 좁은 골목 끝을 바라보면 지은 지 오래된 듯한 예배당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눈에 들어온다. 붉은 벽돌이 고풍스러운 아담한 모습의 승동교회다. 크고 작은 현대식 건물들과 골동품 가게들이 어수선하게 엉킨 그 속에서 약간은 생뚱맞게 보이기까지 한다. 1913년 헌당식을 올린 승동교회는 일제의 창지개명 당시 개명된 ‘인사동’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오랜 역사는 ‘승동’이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승동교회가 있는 자리는 종로 한복판 ‘절골(寺洞, 지금의 인사동 137번지)’이라는 동네였다. 절골이란 동네 이름은 고찰 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승려가 많다 해서 ‘승동(僧洞)’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교회 이름은 현재의 ‘勝(이길 승)洞’으로 바뀌었다.

로마네스크풍의 반원형 아치 모양을 한 큰 창문은 중세적인 느낌을 준다. 교회 몸체를 두른 붉은 벽돌의 색깔이 군데군데 다르다. 한양도성 성곽처럼 시대가 흐르면서 고치고 수리한 흔적이다. 승동교회 예배당은 중국인 모(毛) 씨가 중국에서 가져온 24㎝짜리 붉은 벽돌로 쌓은 건물이다. 지금은 모두 19㎝ 벽돌 일색이어서 새로 주문생산을 해야 했다. 문제는 고졸한 맛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평택 고벽돌 집하장에서 승동교회 것과 똑같은 벽돌이 발견됐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24㎝ 고벽돌이었다. 이 벽돌을 2만 5000장을 확보해 지난 2009년 봄 새롭게 단장했다.

승동교회는 12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온 교회인 만큼 우리나라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3·1운동의 중심지이자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이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진 분열의 아픔을 담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이며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1호인 승동교회는 우리나라 역사가 깃든 또렷한 유산이라 하겠다.


또 다른 이름 ‘백정교회’
계급사회였던 100여 년 전 백정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호적이 없었기에 인구수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거주지도 제한됐다. 당시 백정은 사람이 아니라 여겼기에 백성이 아니었다. 상투를 올릴 수도 없고 망건이나 갓을 쓰는 것도 금지당했다. 당시 망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미성년 표시로 여겼기 때문에 백정은 나이가 많아도 아이 취급을 당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렇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길을 걸을 때도 허리를 구부려야 했고 만약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것이 발각되면 교수형에 처했다. 한번 백정은 영원한 백정이었고 인간의 어떠한 존엄성도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한국이름: 모삼열)가 조선에 온 후 이들에게 드라마 같은 역사가 시작됐다.

갑오개혁이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893년, 관잣골(종로 관철동) 백정 박가가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됐다. 이때 곤당골교회 선교사 무어 목사와 제중원 담당의사 에비슨 선교사가 백정마을을 찾아가 박가의 전염병을 치료해줬다.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백정에게 손을 대어 치료하는 것은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박가는 곤당골(소공동 롯데호텔)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백정이라는 사실은 숨겼다. 무어 목사로부터 ‘성춘’이라는 이름을 얻고 세례를 받았으며 1911년 12월 승동교회 장로가 됐다. 이것은 한국 근대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백정이 세례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파란이 일었다. 곤당골 교회는 양반 위주의 교회였다. 백정과 함께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이들에게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들은 즉시 교회 출석을 거부하고 따로 예배당을 세웠다.

박성춘은 자신과 같은 백정을 위해 애쓰는 무어 목사에게 크게 감동하고 온 힘을 다해 전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대접을 받는 길이 열렸으니 교회로나오라”고 외치며 천민들을 전도했고 그 결과 세례교인이 57명으로 늘어났다. 박성춘은 조정에 신분을 철폐하고 백정도 갓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뜻을 관철했다. 갑오개혁이 단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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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춘을 비롯한 곤당골교회 백정들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밤에 잠잘 때도 갓을 벗지 않았다. 박성춘을 앞세운 무어 목사는 수원, 안산, 영종도 일대를 돌며 백정들에게 세례를 줬다.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을 줄기차게 이어갔다. 신문에 기고도 하고 독립협회가 주관한 관민공동회에서 연설도 했다. 억울하게 투옥된 백정들을 석방시키고 무적자로 살아온 백정들을 호적에 등재해 한을 풀어줬다. 1898년 곤당골교회에 화재가 발생하자 이듬해 양반들이 독립해 세운 홍문섯골교회와 합쳤고 제중원 예배처소를 거쳐 지금의 인사동 승동교회에 이르렀다. 승동교회가 ‘백정교회’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
승동교회는 우리나라 민족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학생 대표들이 3·1운동의 싹을 틔웠던 장소다. 승동교회는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학생단 대표 김원벽이 다녔던 교회로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1919년 2월 20일 학생단 제1회 간부회를 열어 조직체계를 정비한 곳이다. 2월 23일 김원벽은 YMCA 간사 박희도로부터 3월 1일을 기해 민족적 거사를 한다는 계획을 통보받고 미리 준비했던 학생 독립선언서를 승동교회에서 소각한다. 2월 28일에는 제4회 학생단 간부회가 열려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한 역할을 분담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 대표들은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 열었다. 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해 교회 입구에는 3·1운동기념터 표석이 설치돼 있다.

승동교회는 한국 개신교계의 중요한 신앙의 터로 주목받았다. 일제강점기 교회들이 동참했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반성에 앞장섰던 것도 그중 하나.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승동교회 총회에서 ‘당시의 신사참배는 잘못된 것’이라며 무효 선언을 했다. 또 장로교 분열의 현장이기도 하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을 놓고 용공성 시비 끝에 의견이 나뉘어 장로교가 갈라진다. 당시 WCC 가입에 반대하던 측은 승동교회에서, 찬성하던 측은 연동교회에서 각각 총회를 열었는데 이 일로 합동(승동교회 측)과 통합(연동교회 측)으로 교파가 쪼개졌고 여전히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100년이 넘게 서울 한복판에 우뚝 서 역사의 격동기를 고스란히 겪은 승동교회. 그곳엔 우리나라의 험난한 질곡의 근현대사가 짙게 베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