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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담은 웅크림,

신심 가득한 기도

해상관음 기도 도량 보문사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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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도량 보문사
보문사는 석모도 한가운데 있는 낙가산에 정좌하고 있다. 바다가 한 번, 산이 한번 더 감싸 안고 있는 사찰이다. 낙가산(落袈山)은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의미. 그 관세음보살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원력(願力)을 상징해 보문사(普門寺)라 불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찰한다는 관세음.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다. 특히 낙가산 정상에 있는 마애불에서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보문사는 남해 금산의 보리암,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관음 기도 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낙가산 중턱에 자리한 보문사의 전각은 주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삼성각, 석실, 와불전, 사리탑, 오백나한 등이 있다.

<전등사본말사지>에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 금강산에서 옮겨온 회정대사가 세웠다’는 대목이 있다. 보문사를 창건하고 이 산봉우리를 낙가산이라 칭했다는 회정대사는 금강산 보덕굴에서 정진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親見)하고 남쪽으로 걸음 했다. 강원도, 아니 지금의 경기 북부에도 도량을 세울만한 좋은 곳이 많았을 법한데 스님의 발걸음은 이곳 강화도까지 건너와 이 섬에 이르렀다.

소원을 이루는 길
경내는 온통 기도 소리로 가득했다. 희망과 눈물 섞인 기원들이 일주문 너머까지 온 산에 퍼지고 있었다. 일평생 단 하나의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관음 도량이니 만큼 유독 기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끌벅적한 경내와 달리 극락보전 뒤편 마애불로 가는 계단에 발을 들이자 고요함이 찾아왔다. 마애불로 가는 계단 입구에는 ‘소원을 이루는 길’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까마득한 계단이다. 무려 419개나 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세상 이치와 맞닿은 순례의 길이다. 역시나 소원을 이루는 길이 쉽지는 않다.

뜨거운 뙤약볕을 고스란히 머리에 이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향한 곳은 낙가산 정상. 그곳 툭 튀어나온 바위를 어느 날, 어떤 이가 ‘눈썹 바위’라 이름했단다. 그 암벽에 새겨진 관세음보살상은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1928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모든 계단을 올라 비로소 정상에서만이 마애관음상을 친견할 수 있기에 견딘다. 게다가 소원을 이루는 길이라 하기에 참아낸다. 짧은 고행 끝에 드디어 마주한 마애관음상. 높이 9.2m, 폭 3.3m의 당당한 관세음보살이 절 앞에 드넓게 펼쳐진 서해를 바라보고 있다. 마애관음상은 손에 세속의 번뇌를 씻어주는 정병을 들고 있고 연꽃 받침 위에 앉아 있는 자태가 고결함을 더 했다. 수많은 중생들이 이곳에 와서 온갖 번뇌와 꼬여버린 마음들을 풀어냈으리라.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애관음상은 말이 없다. 그저 서해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귀한 돌
<전등사본말사지>에는 보문사 내 석실(石室)에 관한 설화도 실려 있다. 보문사를 창건한 지 14년 뒤인 649년, 사찰 앞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의 그물에 작은 돌덩이들이 걸려 올라왔다. 만선을 꿈꾸고 나간 바다에서 건진 것이 물고기가 아니라 돌덩이들이라 실망했을 터. 어부는 그 돌을 도로 바다에 던지고 또다시 그물을 쳤다. 그러나 연거푸 돌만 걸리자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낮에 그물에 걸렸던 돌들은 천축국에서 보내온 귀중한 불상인데 어찌하여 이를 모두 버렸느냐”며 질책한 후 “날이 밝으면 다시 그곳에 가 불상을 건져 명산에 봉안하라”고 당부했다. 다시 바다로 나간 어부는 그물을 던져 그 돌을 건져 올렸다. 꿈속에서 노승이 당부한 대로 어부는 낙가산으로 불상을 옮겼다. 그러던 중 현재의 보문사 석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불상이 무거워져 더는 옮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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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썹바위에 새겨진 마애관음상 2. 마애불로 향하는 계단 3. 와불전의 와불상
 



어부는 석굴 안에 불상을 모셨고 그것이 지금의 보문사 석실에 안치한 23체 의 나한상들이다. 자연 암벽 아래에 문을 만들고 나한을 모셨으니 일종의 나한전(羅漢殿)이다. 보문사에 들어서면 왼쪽 마당에 보이는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霓門). 이곳이 석실 입구다. 관광객들과 불자들이 뒤섞여 분주한 석실 밖과 달리 불자들이 기도를 올리는 석실 안은 고용함과 적막함이 흘렀다. 석실 앞엔 맷돌 하나가 놓여있다. 신라 시대부터 있었다는 맷돌. 한때 수백 명에 달했다는 보문사 승려들의 공양을 위해 이 맷돌로 곡식을 찧었단다. 그래서인지 크기가 일반 맷돌의 서너 배는 족히 될듯하다. 맷돌 옆에서는 700살 먹은 향나무가 용틀임하고 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에 죽은 것처럼 보였으나 3년 후에 다시 살아났다.

일체 번뇌를 끊고 얻는 깨달음
아름답지만 힘겨운 인간의 삶.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압박과 고비의 연속인 인생에 있어 기도는 큰 위안이자 탈출구가 아닐는지. 석실 옆 언덕 위에 자리한 와불전에 들어가면 마음속 무거움이 조금은 덜어진다. 석가모니 부처가 한쪽 팔을 괴고 한가로이 옆으로 누워 은은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열반 당시 부처의 모습을 자연석에 그대로 조각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속 번뇌가 사라지면 진정한 자유의 길, 해탈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와불전 내부는 와불상 뒤로 공간이 트여있어 돌면서 참배할 수 있다. 절을 세 번 한 후 부처의 발밑부터 돌기 시작한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어느새 비워진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온다. 진정한 부처의 가피(加被)는 깨달음을 얻고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찾는 것이 아닐까.

와불전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더 눈을 돌리면 오백나한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한(羅漢)은 아라한의 준말로 부처의 제자를 뜻한다. 아라한(阿羅漢)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킨다. 오백나한은 부처가 입멸한 후 그의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을 때 모인 500명의 제자다. 2009년 와불전과 함께 천인대에 조성됐다. 천인대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로 창건 이후로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 사용됐는데 1000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의미로 ‘천인대’로 불린다. 오백나한은 진신사리가 봉안된 33관음보탑을 중앙에 두고 감싸는 형상이다. 표정과 모습이 제각각이다. 무표정하거나, 찡그리거나, 한쪽 눈을 감았거나, 허공을 응시하거나, 옆 사람을 쳐다보거나, 얼굴을 만지거나, 먼 산을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같은 표정은 하나도 없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지만, 제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생각을 하며 사는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