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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아픔,

매화꽃 향기로


글, 사진. 이지수



밤하늘의 빛나는 별, 바람에 나풀거리는 잎사귀들, 들에 핀 예쁜 꽃들과 석양으로 물든 아름다운 노을…. 이처럼 세상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무수히 많다. 그 존재함을 믿고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보이는 것,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해 ‘믿는다’라는 표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확신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다. 신앙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라 했던가. 그러한 신앙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전부’ 견디게 한다. 심지어 죽는다 해도…. 이는 치열한 전쟁과 같다.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과 이를 훼방하는 존재와의 전쟁. 이로 인해 종교가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사람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 부른다. 그들이 목숨을 바치기까지 지키고자 했던 신앙은 곧 영원한 것에 대한 열망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는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알려왔다. 이를 설명하듯 신약성서 한 구절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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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품 같은 곳 당고개 순교성지
서울 용산 도심 안에 고귀한 순교의 정신이 깃든 곳이 있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 당고개 순교성지다. 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여 작고 소박해 보이지만 천주교인 10명이 순교한 성스러운 곳이다. 용산 전자상가 뒤편 신계역사공원 안에 있어 마치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있는 듯 평안함이 감돈다.

1839년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 주로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이뤄졌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이 이곳 서울 용산의 당고개에서 행해지게 된다. 당시 피 냄새가 설날 대목 장사를 방해한다며 처형장을 옮겨달라는 상인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지역 재개발로 인해 2008년에 철거됐다가 3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2011년 다시 문을 열었다.

건물 안에는 성당과 전시관이 있고 옥상에는 야외 제대와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됐다. 이 순교성지는 기존 가톨릭 성당이나 성지와 비교할 때 파격적인 모습이다. 성모자상은 한국적인 어머니의 품을 형상화했고 뒤편에는 고즈넉한 한옥이 들어서 있다. 벽은 옹기와 도자기 조각을 이용해 황토빛의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서 처형된 순교자 중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가 있어 이곳을 ‘어머니의 성지’라 부르기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묻혔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됐다. 또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7명의 순교자가 33년간 묻힌 곳이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처형된 순교자 2명도 43년 동안 매장됐던 유서 깊은 곳이다.

영원으로 가는 하늘길
당고개 순교성지에서는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이틀간 10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첫날에는 한국 천주교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를 비롯해 박종원, 홍병주, 권진이, 이경이, 손소벽, 이인덕 등 7명이 순교했다. 다음날에는 홍영주, 최영이, 이문우 등 3명이 처형됐다. 홍병주와 홍영주는 형제이며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의 손자였다. 형제나 부자를 함께 처형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선의 법률에 따라 두 사람은 하루 시차를 두고 처형됐다. 이 중 이성례를 제외한 9명은 성인 반열에 올랐다. 이성례는 오랜 기간 시복 시성에서 제외됐다가 다른 동료 순교자들보다 뒤늦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그가 이토록 뒤늦게 복자로 추대 된 사연은 무엇일까. 복자 이성례의 안타까운 순교사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840년 1월 31일, 서울 만초천 하류 당고개에서 이성례는 칼을 받는다. 피와 고름이 엉겨 붙어서 썩은 멍석에 눕혀 있다가 젖도 물리지 못한 채 죽은 막내, 먼저 순교한 남편 최경환, 이국땅에서 신학 공부에 정진하던 맏이 최양업, 부모의 순교로 고아로 남겨져 신산스런 삶을 살아갈 네 자녀까지…. 망나니의 칼을 받는 그 순간 이성례가 떠올렸을 얼굴들이다. 포도청 옥에서 굶어 죽은 젖먹이 때문에 ‘눈물의 배교(背敎)’를 해야 했던 그는 같은 날 순교한 박종원과 홍병주 등 6위와 달리 아직 시성의 영예를 안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례의 사연은 당고개에서 순교한 다른 순교 성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졌다. 한국 가톨릭사에서 그의 순교는 한국적인 모성과 신앙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면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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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까지 하느님께 바친 어머니
이성례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해 충청도 홍주 다락골 새터에 살면서 21세에 최양업을 낳았고 그 뒤로도 슬하에 다섯 자녀를 더 뒀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양으로 이주했으나 이때부터 박해 속에서 강원도와 경기도 부평으로 전전해야 했다. 오로지 ‘신앙 때문에’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배고픔에 칭얼대는 자식들을 다독이며 낯선 타향으로 이리저리 떠도는 고단한 삶이었다. 아이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릴 때면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고통은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모범, 어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구해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양업 신부는 그가 남긴 서한에서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와 십자가 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셨다”며 어머니의 가르침을 회고했다.

이성례는 조선 헌종 2년인 1836년 천주교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남 최양업을 마카오로 떠나보냈다. 1837년 7월 외부와 단절된 피난처를 찾아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 뒤뜸이로 들어가 일가족이 함께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을 일구면서 고난도 잠시 멈췄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는 그의 단란한 가정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고 어린 자녀 다섯을 데리고 교우 40여 명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후 배교하라는 모진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형벌을 받다가 남편 최경환은 먼저 옥에서 순교한다. 이성례는 젖먹이와 함께 갇혀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고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 와중에 남편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됐고 고아 아닌 고아가 돼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는 어린 자식들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욱이 굶주림과 고문 탓에 젖이 나오지 않아 옥중에 차갑고 더러운 바닥에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굶어 죽자 이성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남은 아이들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천주를 모른다”며 외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하지만 큰아들 양업이 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압송됐다. 이때 이성례는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굳게 결심한다. 둘째 아들 의정이 감옥을 드나들며 구걸한 돈으로 마련한 음식을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이성례는 철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 없이 외롭게 버려질 것을 생각하자 모정에 다시 한번 몸을 떨어야 했다.

아이들이 감옥에 찾아와 “어머니, 어머니!”하며 목 놓아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다들 가거라.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절대 잊지 말아라. 하느님 계명을 잘 지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 거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양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라고 둘째 의정을 불러 타일렀다. 순교할 것을 다짐하고 미리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어머니로부터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의정은 옥에서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어린 네 형제는 망나니를 찾아가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라며 온종일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내밀었다. 당시 천주교인을 참수할 때는 녹슨 칼이나 무딘 칼로 여러 차례 목을 베어 고통을 주면서 처형했다고 한다. 눈물겨운 네 형제의 청탁은 망나니의 가슴을 움직였다. 망나니는 밤새 칼을 갈아 달빛에 비쳐 보았고 이튿날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켜줬다. 그날, 어머니 이성례가 단칼에 참수되는 모습을 네 형제는 먼발치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굶주리는 젖먹이를 뿌리치고 순교했다면 그는 일찌감치 성인이 됐을 뿐 아니라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을 것이다. 모성을 끊지 못하고 잠시 배교했던 이성례는 결국 그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의 이슬이 됐다. 이러한 그의 순교에 얽힌 사연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성례의 가슴 시린 순교사를 알고 나니 당고개 순교성지 성당 건물 입구에 새겨진 시비(詩碑)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곳엔 이해인 수녀의 <당고개 성지에서>라는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다. ‘님들을 닮지 못한 부끄러움 그대로 안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우리/ 이 땅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처절하게 고독하고 용감했던 님들의 선택으로/ 우리가 누려왔던 빛나는 영광을 당연히만 여겨서 왔던 무심함과 우매함을 용서하십시오… (중략) 사랑으로 피 흘리신 순교성인들이여/ 찔레꽃 아픔을 매화 향기로 승화시키는/ 사랑의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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