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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
그날의 순교


천주교 대전교구 신리성지 순교미술관


글. 백은영
사진.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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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17세기 전반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관리들에 의해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 <칠극> 등이 들어오면서였다. 이때는 천주교를 종교가 아닌 서양의 학문이라 하여 ‘서학’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당쟁에서 밀려난 양반(남인)들에 의해 연구되고 전파돼 후에 종교로 받아들이게 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시간이 흘러 18세기 말엽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중첩돼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 그치지 않았고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이 짙어져 갔다. 조선을 지탱하는 학문이었던 성리학으로는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실학에 활기를 실어줬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천주실의> 와 같은 천주교 교리서가 더욱 널리 읽혀지게 되고 어느덧 학문적 호기심은 신앙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벽·권철신·권일신·정약종·정약용·이승훈 등이 있으며, 이들은 천주교신앙 실천운동을 일으켜 1784년(정조 8) 조선천주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조선천주교의 요람
“신리성지는 조선의 카타콤바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된 곳으로 이곳 역시 1866년(고종 3)에 자행된 병인박해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가진 못했다. 신리성지는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후 병인박해 때까지 가장 큰 신자 공동체가 있던 곳으로 신리에 살았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박해 때 신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순교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신리성지 내 초가집은 2004년 복원된 것으로 손자선(손도마, 1866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인 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년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초창기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파리 외방전교회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다블뤼 비망기>이다.

신리성지에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돼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손자선 성인은 28살에 병인박해로 순교한 후 신리의 선산에 묻혔으며,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명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의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또한 위앵 민 루가 성인 신부의 조선 기착지이자 유일한 사목 활동지이며, 성 다블뤼 주교, 성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가 등이 순교를 위해 스스로 붙잡힌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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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 주교 기념관 지하 2층에 대한민국 최초로‘순 교미술관’이 개관됐다.
 



우리나라 최초 순교미술관 개관
아직 차가운 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3월 25일, 조선천주교의 요람으로 불리는 신리성지(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충남도 기념물 제176호)를 찾았다. 성 다블뤼 주교 주교서품 160년 기념일이기도 한 이날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미술관이 신리성지 안에 개관하는 날이기도 했다.

신리성지에 도착하면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이 비둘기를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소녀상이다. 이 조형물은 성령을 받은 소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소녀상 옆으로 한반도 지형을 연상케 하는 연못이 있는데 수면 위에 비췬 비둘기를 든 소녀상의 모습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루 속히 이 땅, 이 민족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해 통일을 이루고, 전 세계에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민족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잠시 짧은 기도를 올렸다.

허허벌판처럼 느껴지면서도 평온함이 느껴지는 나지막한 언덕을 지나면 다블뤼 주교 기념관이 나온다. 바로 이 기념관 지하 2층에 1392㎡ 규모의 순교미술관이 세워졌다. 순교미술관을 지하에 만든 것은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지하묘지인 카타콤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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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다섯 성인의 영정화 중 일부
 



순교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사뭇 무겁다. 단지 미술관 내부가 어둡기 때문만은 아니다. 순교자들의 삶을담은 그림들이 희미한 조명 빛에 언뜻언뜻 보일 때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그들의 삶이 위대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순교미술관에 전시된 18점의 작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거장 일랑 이종상(요셉) 화백이 신리 신앙인들의 믿음과 삶을 묵상하며 4년여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전통 채색기법인 장지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전시 작품으로 성 다블뤼 안주교, 성 오매트르 오신부, 성 위앵 민신부, 성 황석두 루가, 성 손자선 도마 다섯 성인의 영정화 5점과 다블뤼 주교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록한 1000호(세로 228㎝ 가로 480㎝) 크기의 순교 기록화 13점 등 총 18점이다.

일랑 이종상 화백은 이미 수년 전부터 순교미술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로 사경을 헤매는 등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순교미술관 개관식에서 이 화백은 “너무 아파서 ‘한번만 살려주시면 주님 주신 재능을 좋은 곳에 사용하겠다’고 기도 했었다”며 “그 기도를 들으셨는지 병원에서 퇴원 후 순교미술관 개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귀한 만남들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건강이 허락되는 한 주님에게 진 빚을 갚으며 살 수 있게 해달라던 그의 기도는 이곳 순교미술관에 18점의 작품을 남기면서 이미 응답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순교기록화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미 가슴이 벅차오르고, 지금이 내 신앙을 돌아보게 만드니 말이다.

순교미술관이라고 해서, 또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이 순교기록화라고 해서 비단 기독교인들에게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간절함과 진실함에서 비롯된 순교 혹은 죽음은 숭고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타인을 위한 것이면 그 숭고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 희생이 마음에 주는 울림은 더욱 커진다.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 바로 이 사랑과 희생의 터 위에 세워졌으니 기독교인에게 국내 최초 순교미술관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큰 감동과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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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가 이종상 화백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