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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눈을 뜨다


글,사진. 김소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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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상 조각품
 


나무들은 잠을 잔다.
하루 이틀 몇 년 또는 몇 십 년.
누군가 매만져
새로운 무엇으로 만들어줄 때까지
길고 긴 잠을 잔다.
나무들이 자면서 꾸는 꿈.
목조각가들은 그 꿈을 알아보고
실현시켜주는 이들이다.
조각도가 나무들의 꿈을 새겨놓으면
나무들이 비로소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

눈을 뜬다.



‘목우헌(木遇軒)’은 민속목조각 무형문화재인 김종연 장인의 작업실이다. 그의 호인 ‘목우(木遇)’는 나무와 우연히 만났다는 뜻. 그래서 작업실도 목우헌이다. 지나가는 관람객인 양문을 두드렸는데도 장인은 흔쾌히 작업실 옆에 딸린 전시실 문을 열어주었다.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디뎌 작품들과 만났다.

이런 느낌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산해진미가 가득 올려진 만찬을 받아드는 느낌? 아니 그보다는 더 찬찬하고 그윽하다. 한점 한 점 섬세하게 빚은 솜씨, 부드러운 선(線)과 양감, 둘러보면서 속으로 감탄하였다. 사람을 만났을 때 고요하고 맑은 인품으로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 작품도 역시 그렇게 끌리는 작품들이 있다. 나무들은 딱딱한 물성을 버리고 저마다의 풍부한 표정으로 살아 있었다. 눈코입이 있지도 않은데 표정이 느껴진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한참을 그렇게 들여다보았다. 작품을 만든 장인이 옆에 서 있는데도 그간의 사정이나 걸어왔던 길에 대해선 물어볼 짬도 없이,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감상하기에 바빴다. 조각과 형태가 제각각인 목침들, 봉황 두 마리가 위엄있게 앉아있는 국새, 서찰과 두루마리 종이들을 꽂아 두는 고비, 종이 벼루 먹 붓의 문방사우를 넣어두는 연상, 양각으로 꽃과 나뭇잎 등을 새겨넣은 표주박들, 연꽃 위에 자리한 관음 보살상, 촛대, 붓통, 다용도 목기함, 십장생도, 이밖에 현대적인 조형감각을 살려 만든 작품들. 나무결의 매끄러운 질감과 결을 눈으로 훑으며, 쓰다듬고 싶어서 손이 간지러운 참인데 장인이 스스럼없이 말한다.

“만져봐도 돼요.”

아, 이렇게 멋진 작품들을 마음대로 쓰다듬고 만져봐도 된다니! 오목하게 들어간 자리, 불룩 튀어나온 자리, 양각 또는 음각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형태들, 쓰다듬는 손이 기뻤다. 아름다움은 종종 시각적 음미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촉각은 훨씬 더 예민하고 생생한 기억을 머릿속에 남긴다. 어릴 때 살던 집에도 목침 두어개가 있었다. 그중 2절 접개식(Z자형) 목침은 그 투박한 생김새가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폈다 접었다 갖고 놀았기 때문이리라. 어른들이 가끔 사용하는 모습을 봐 목침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인 내가 베기엔 턱없이 불편한 베개였다.

작업실에 얌전히 누워있는 여러 목침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그런저런 생각들,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나무로 만든 용품, 용기들은 어느 집에나 있었다. 만지면 차갑지 않고 언제나 그만큼의 온기와 부드러움으로 제 몫의 기능에 충실했던 목기와 목각품들. 나무로 만든 것들에게선 늘 온기가 느껴졌다. 다정한 위로 같은 것, 토닥토닥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미소 같은 것. 목우헌에서 보고 느꼈던 것도 그런 미소였다. 나무들이 짓는 미소. 나도 더불어 미소를 지으며 목침들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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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연 민속목조각 장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침은 백제시대 무녕왕릉의 왕비 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목침은 가운데가 움푹 패인 사각 장방형으로, 전면에 주칠(朱漆)이 되어 있고 가느다란 금박선으로 거북등 모양의 육각형 문양(귀갑문)이 그려져 있다. 귀갑문 안에도 용, 봉황, 연꽃 등의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데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품위가 느껴진다. 특히 감탄스러운 것은 목침의 양쪽 윗부분에 앉아 있는 봉황의 모습. 바람에 날리는 듯한 볏과 호기롭게 벌린 입이, 여기 누웠을 왕비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목우헌에도 무녕왕릉 목침을 재현해 만든 작품이 있다. 봉황의 모습을 달리 하고 세세한 문양은 생략했으나 역시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침의 품격이다. 그 외에도 사대부 선비들이 베고 잤던 담백하고 문기(文氣) 어린 목침, 수를 놓아 아름답고 우아한 아녀자들의 목침, 속을 비어있게 조각(투각)한 목침, 12지신상 목침, 호랑이와 사자상 목침 등 서로 다른 모양을 자랑하는 목침들이 전시장에 가득하다.


“예전에는 훨씬 많았어요. 목침만 갖고도 전시장을 채울 정도였으니까.”

김종연 장인은 이미 2005년에 목침 분야 최연소 기능명장으로 선정된 바 있다. 나무를 다루는 데 있어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임을 입증받은 것이니, 그 실력이 어디 목침에만 한할까. 정부가 공모한 대한민국 5대 국새대전에서는 쌍봉황 국새로 2등 우수상을 차지했다. 전주 초입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현판 ‘전주’도 그의 작품이다. (글씨는 서예가 효봉 여태명 선생의 것이다) 목조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을 무렵 박찬수 목아박물관장을 사사하면서 기본기를 익힌 김종연 장인은 독립하여 공방을 차리고 혼자만의 작업에 몰두해왔다. 밤이 깊어가는지 날이 새는지 모르고 나무를 매만진 시간들이었다. 서각과 전각, 여래불상들, 십장생도 등의 부조, 목침들과 현판, 각양각색의 목공예품과 목조각품들이 그렇게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동자승과 함께 연꽃 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은 손으로 조각한 것이 맞나 싶게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하다. 이걸 어떻게 조각했느냐 물으니, 시간도 밥 먹는 것도 잊고 미친 듯이 몰두하던 한창 때 만든 거라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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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녕왕릉 왕비 목침을 재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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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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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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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황 국새 손잡이 부분(위), 바닥면(아래)
 




품위 있고 고아하며 때로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들. 김종연 장인의 작품세계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다. 전통적인 기법과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미감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유물’이 아닌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유용한 미를 갖춰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오늘을 살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과거에서 끄집어내온 박제된 표정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생생한 표정이다. 단단하고 정교하게 형태를 갖추었지만 나무로서의 제 본질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작품들, 오롯이 제 결대로 살아있는 작품들을 쳐다보며 잠시 상상 속을 거닐었다.

저 소박한 목침, 오수(午睡)에 빠져들어도 정신만은 허투루 놓지 않았던 선비의 책상 옆에 단정하게 놓여 있었으리라. 책을 읽다 팔걸이에 기대 잠깐 쉬어도 좋으리. 사박사박 다가오는 소리는 둥그스름한 목기에 다과를 얹어 내오는 소리. 바람이 대나무 발을 흔들면 반가운 이의 서한이 도착하고 창살에 기대 읽어가는 편지에 잔잔한 파문처럼 미소도 번지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사람’이라고.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사람의 몸과 삶과 생각, 그 모든 것들을 뭉뚱그린 사람 자체. 생명체 중에서 가장 많은 모순을 껴안고 있는 존재라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나무는 사람을 닮았다. 생태적으로 닮았다기 보다는 그 목숨의 결과 호흡이 닮았다. 뿌리는 땅에 박고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 숲을 이루고 살지만 각자 독립적으로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는 나무. 한 생에서 이어지는 다른 생으로 나무는 깊고, 천천히, 숨을 쉰다. 사람도 그러하다. 켜켜이 덧입혀지는 시간 속에서, 사람도 나무도 자기의 결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나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인지. 목우(木遇), 나도 오늘 나무를 우연히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