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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 팔상도(八相圖)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불화



글. 신정미 사진제공. 불교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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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成道) 후
제자들에게 진리를 설하시다


팔상도 중 일곱 번째 상인 ‘녹원전법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이루고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행하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부처님은 예전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만나기 위해 사르나트의 녹야원으로 길을 떠났다. 부처님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中道)와 팔정도(八正道), 사성제(四聖諦)를 중심으로 설법했다. 이것이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初轉法輪)이다. 수행자들은 그 법에 귀를 기울여 부처님과 동일한 경지를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됐다. 이리하여 불교 교단의 기본인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가 형성됐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 한동안 보리수 아래 머물며 삼매경에 들어있었다. 삼매경에 든 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를 주저했다. 이 때 최고의 신인 범천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중생을 위해 설법해줄 것을 세 번이나 간청했다고 한다. 당시 부처님의 심정은 이렇게 전해진다.“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또 남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상응부경전>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에게 진리를 깨우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부처님은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로 한다. 범천의 간청에 따라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하고 이렇게 알린다.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려라.”

녹원전법상은 불전의 많은 내용에 비해 상당히 간결하게 보살의 성도 후 법을 설하고 계율을 전하는 것만을 압축해 나타내고 있다. 그림은 크게 4장면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장 두드러지게 묘사된 장면으로 그림 중앙과 오른쪽 상단에 부처님이 연화좌에 앉아 수많은 보살, 신중, 제천대중을 거느리고 설법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좌우로 문수·보현 두 보살과 그외 군중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나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하늘로부터의 축복과 광명이 찬란하게 표현돼 있는 것으로 보아 장엄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 설법 장면은 <화엄경 40권본>에 잘 묘사돼 있다. 부처님이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에서 법을 설하실 때 문수·보현보살과 500 성문, 세간의 임금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60권본이나 80권본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을 이룰 때라고 표현하는데, 설법 당시 많은 대중이 모였음은 변함이 없다.

두 번째는 그림 오른쪽 하단에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5인의 비구에게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를 설파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때 두 사람은 옆에 서 있고 세 사람은 무릎을 꿇고 모두 합장을 하고 경청하는 모습이다.


전도를 결심한 부처님은 깨달음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으로 한때 스승이었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생각했지만, 이미 그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아시고 전에 설산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갔다.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하자 타락한 사문이라 비난한 이들을 깨달음을 전하는 첫 대상으로 삼았다. 사슴동 산에 있던 다섯 수행자는 멀리서 부처님을 보고 타락한 고타마에게 아는 체도 하지 않기로 했으나, 부처님이 다가오자 그 위엄과 자비에 압도돼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자리를 권했다.

“수행자들아,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길이 있느니라. 그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의 길이다. 수행자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바른 길(中道)을 배워야 한다. 나는 바로 바른 길을 깨달았으며, 그 길에 의하여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을 버리고 평화로운 해탈의 기쁨을 얻었느니라.”

첫 설법은 이렇게 중도와 사성제 등을 설하여 연기의 이치를 가르쳤다. 이것을 최초 설법인 초전법륜이라 한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다섯 수행자 가운데 교진여가 맨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고 곧 나머지 수행자 모두 그 가르침을 이해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아라한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 제자가 됐다. 이들이 부처님 최초의 제자로 비구의 시초이다.

사슴동산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한 장자(長者)의 아들 ‘야사’라는 청년과 그 친구들이 출가해 부처님을 따랐다. 또 그 아들을 찾으러 왔던 야사의 부모도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재가 신도로서 부처님께 귀의해 우바새(남자 신도)·우바이(여자신도)가 됐다. 이로써 교주이신 부처님(불보)과 부처님의 가르침(법보)과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승보)로 불·법·승의 삼보를 갖춘 불교 교단이 비로소 성립됐다.

세 번째는 그림 왼쪽 하단에 수달다 장자가 아사세 태자의 동산을 사서 기원정사를 건립하고자 소 등에 황금을 싣고 와 동산 땅에 까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기원정사가 세워진 배경은 <불소행찬> ‘화급고독품(化給孤獨品)’, <현우경> ‘수달기정사품(須達起情舍品)’에 설명돼 있다. 어려운 이들에게 보시행을 베풀어 ‘급고독’이란 별칭을 갖고 있던 수달다 장자는 부처님께 정사를 보시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장소를 물색하던그는 아사세 태자가 소유한 기원을 눈여겨 두고 팔 것을 권했다. 기원 전체에 황금을 깔아 정사 건립의 원력을 보여준 장자와 그 뜻에 공감한 태자가 함께 건립한 기원정사(祇園精舍)는 사천왕궁처럼 장엄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 야사를 포함한 친구 55명 등 60명의 수행자를 제자 삼아 진리를 가르쳐 깨달음을 얻게 하고, 여러 지방으로 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 가르침을 전할 것을 권유했다.

“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을 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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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정도(八正道)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12연기(十二緣起)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6입
(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
(有)·생(生)·노사(老死)의 12요소로 된 연기
설로 12지연기(十二支緣起)·12인연(十二因
緣)이라고도함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 <잡아함 승색경> 이것을 전도 선언이라 한다.

그 뒤 부처님은 우루벨라로 가서 당시 가장 이름있는 종교가였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해 그들과 제자 1000여 명을 함께 받아들였다. 왕사성의 종교가를 모두 교화한 이 사건은 국왕과 백성을 놀라게 했고, 국왕인 빔비사라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게 됐다. 특히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우기(雨期) 동안 머물며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사원을 기증했으니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10대 제자 중 하나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제자 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마하가섭이 제자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왕사성의 죽림정사는 사위성의 기원정사와 함께 전도의 양대 거점이 됐다.

네 번째는 그림 중앙 하단에 흙을 보시하는 아이와 흙 공양을 받는 부처님, 집 안에서 방바닥에 흙을 바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흙을 보시하는 장면에서 부처님이 손을 내밀어 어린아이로부터 흙을 받는 모습이 있고 아난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며, 아이들이 흙으로 집을 만들기도 하고 탑 형태의 흙무덤을 만들기도 하는 재미있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림 왼쪽 상단의 전각은 계단이 높고 장엄하여 전각이라기보다 탑의 형태에 가깝게 표현됐으며, 좌우에는 성중과 보살이 땅과 하늘에 두루 머물러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거대한 탑은 아수가왕이 세울 탑이기도 하다. 이 탑은 <현우경> ‘아수가시토품(阿輸迦施土品)’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 탁발을 나섰다가 아이들이 흙장난 하는 것을 보셨다. 흙을 모아 집과 창고를 짓고 보물과 곡식을 만들던 아이들은 부처님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창고에서 흙을한 줌 쥐어 곡식이라 생각하고 공양을 올렸다. 아이가 흙을 보시하자 부처님은 발우를 낮추고 머리를 숙여 받으시고, 아난에게 일러 그 흙을 방바닥에 바르도록 했다. 부처님은 흙을 보시한 아이가 그 공덕으로 부처님 열반 후 100년 뒤 아수가란 이름의 국왕이 돼 8만 4000탑을 세울 것이라 수기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 지 몇 년 후에 고향인 카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10대 제자가 된 아난과 라훌라, 아나율, 우팔리 등의 제자를 출가시켰다. 유마경에 언급되는 10대 제자란 부처님 제자 가운데 수승한 능력을 가진 열 분의 제자로 지혜제일 사리불(舍利弗), 신통제일 목건련(目犍連), 두타제일 마하가섭(마하迦葉), 천안제일 아나율(阿那律), 해공제일 수보리(須菩提), 설법제일 부루나(富樓那), 논의제일 가전연(迦旃延), 지계제일 우팔리(優婆離), 밀행제일 라훌라(羅睺羅), 다문제일 아난다(阿難陀) 등을 말한다. 이들은 불법의 홍보와 전수는 물론 교단의 유지와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깨달으신 뒤부터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중인도 지방을 유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다. 또한 불교는 당시 많은 제자들에 의해 널리 전파됐다. 부처님 재세 시에 이미 불교의 가르침은 동쪽은 갠지스강 하류까지 전해졌으며, 서쪽은 아라비아해 연안에까지 전파됐다. 부처님은 수행자와 재가자, 귀족과 평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셨다.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깨달음에는 빈부귀천이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