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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7점·보물 5점, 불국사는 보물창고
그림자를 찾는 석가탑, 형제를 잃은 다보탑


불국사,

신라의 밤을

노래하다


글. 백은영 사진. 백은영, 박선혜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가수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다. 현인의 독특한 창법 덕에 젊은 세대에게도 노래의 앞부분인 “아~ 신라의 빠아암~이이~여”는 익숙하다.
이 노래 때문인지 유독 불국사의 종소리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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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신라 천년 고도로 명승고적이 많아 문화재의 보고로도 불리는 경주.
도시 전체가 문화재와 유적으로 이뤄진 이곳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불국사’다. 194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노래 <신라의 달밤>에도 등장할 만큼 불국사는 신라 천년 고도(古都) 경주를 대표하는 천년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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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
사라진 돌사자상은 어디에
 


경주 토함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천녀고찰 불국사(사적 제502호)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발원해 개창되고 혜공왕 10년
(774)에 완성됐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된 탓에 일본군에 의해 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던 것이 1969~1973년에 이뤄진 발굴조사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비록 신라시대 대규모 복합 건축물을 재현해 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경주시 동남쪽 토함산에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불교유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인 불국사는 고대 불교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석굴암은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로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 존불을 안치했다.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북아 고대 불교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경주 자체가 문화재의 보고로 불리는 것처럼 불국사 자체도 보물창고다. 불국사 경내에 있는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삼층석탑(국보 제21호),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국보 제22호), 청운·백운교(국보 제23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삼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6호) 등 7점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사리탑(보물 제61호), 석조(보물 제1523호), 대웅전(보물 제1744호), 가구식 석축(보물 제1745호), 영산회상도·사천왕 벽화(보물 제1797호) 등 5점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야말로 문화재의 보고, 보물창고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동서로 놓여 있다. 당시 동일한 외관을 가진 탑 한 쌍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내용이 반영돼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파할 때 보배로운 탑이 땅에서 솟았고, 이미 깨달음을 얻은 다보여래가 그 탑 위에 나타나 석가모니의 설법을 증명했다. 그렇게 다보여래와 석가모니가 탑 안에 나란히 앉았으니 다보탑은 다보여래를,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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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다보탑과 현 다보탑
현재의 다보탑과 과거의 다보탑 사진을 비교해보면 ‘사자상’의 위치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석가탑,
그림자가 없다?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져 있어 더욱 익숙한 다보탑. 본래 다보탑 기단의 돌계단에는 네 개의 돌사자상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인 1925년경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사리와 사리장치 등과 함께 사라져 단 한 마리만이 남았다. 그나마도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사자상의 머리(얼굴)부분이 깨져있어 일제가 약탈할 때 두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돌사자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힘이 들어가 툭 불거진 앞발이 다부진 인상을 준다. 게다가 한쪽으로 살짝 치우친 듯한 모습에 역동성까지 느껴진다. 과하지 않은 갈기의 표현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모습이 아름답다. 그 조화로움이 탐났던 것인가. 맥없이 형제를 잃어버린 돌사자상이 언제까지 저리 홀로 외로이 탑을 지키고 있어야 할까. 약탈 문화재의 행방을 찾고 환수하는 일이 국민의 관심 속에서 좀 더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부의 노력은 필수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단순히 유형의 것만 찾아오는 것이 아닌, 우리네 정신문화까지도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운의 역사 속에서 형제를 잃은 이 돌사자상은 이후 원래의 위치에서 살짝 비켜 석탑 앞면(대웅전이 뒤로 보이게) 가운데로 이동하게 된다. 네 마리였을 때는 사면(四面) 한 쪽 모서리에 자리했지만, 홀로일 때는 그 모양이 왠지 탑 전체의 균형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형제도 잃고, 본래 제 자리도 잃은 다보탑. 언젠가 원형의 모습 그대로 복원될 날이 오길 바라며, 보수 작업 중인 석가탑으로 향했다.

석가탑으로 더 익숙한 삼층석탑은 답사 당시 안타깝게도 해체수리 중이었다. 지난 2011년 5월부터 시작해 올 6월 30일까지 장장 5년 2개월에 걸친 대대적인 이 보수 작업으로 실물 그대로를 만나진 못했지만, 해체된 채 다시 완전체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탑을 보면서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이 맡아 진행하는 이번 수리작업은 상륜부, 탑신부, 기단부 해체, 사리장엄구 수습, 내부적심 해체 등 해체작업 및 훼손부재 접합 및 강화, 내부적심 보강, 은장 제작 및 교체 등을 통해 올 여름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바로 이 삼층석탑 일명 ‘석가탑’ 2층에서 발견됐다. 무구정관대다라니경은 폭 6.7㎝, 길이 6.2m의 두루마리로 국보 126호로 지정됐다. 석가탑에는 애틋하고도 슬픈 전설이 서려있다.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민간설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백제 석공(石工)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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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훼손된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탑을 만들기 위해 신라로 건너간 남편 아사달. 아사달은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아내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불국사가 있는 신라도 떠난 아사녀. 어렵게 도착했지만 아사달의 다짐과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염려한 주지는 아사녀를 절에 들이는 대신 영지라는 연못에 가서 기다릴 것을 부탁한다. 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니 그때 남편 아사달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아사녀는 물속에 몸을 던졌고(혹은 연못에 기묘한 모습의 흰 탑(다보탑)이 보여 그 탑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설도 있다) 탑이 완성된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사달 또한 못에 몸을 던져 아내를 따라갔다는 이야기다. 아사달, 아사녀의 이야기가 세세한 부분에서는 조금씩 다르지만 연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점만은 같다. 그래서 무영탑(無影塔) 즉‘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다보탑과 석가탑에 얽힌 이야기들. 그 탄생의 배경에는 탑의 뛰어난 예술성에 대한 찬미와 경외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