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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인가 ‘우상’인가


개신교 교회보다 구교인 가톨릭 성당에서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 그리스도의 고난상 등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등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다. 종교개혁을 외쳤던 마르틴 루터는 이를 크게 탐탁지 않아 했다.


글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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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 기독교 그림을 그린 종교 그림


1517년 10월 31일 독일 베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대자보가 붙었다. 당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의 타락상을 알리는 반박문 95개를 고스란히 적었다. 사건은 유럽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초였다.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공의회에서 내린 결정은 서양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루터파는 “신앙이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로 교회에서 미술품을 사용하는 데 반대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주관으로 열린 트렌토 공의회는 성화나, 성상은 신앙적으로 본받을 만한 성인이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성화나 성상을 허락했다.

마음 졸인 미켈란젤로
   
트렌토 공의회에서 가톨릭교회는 성화나 성상을 허락했으나 표현의 자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1542년 종교재판소를 설치해 종교 관련 책이나 미술작품 등을 통제했다.

종교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기독교 본질을 왜곡하거나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는 표현을 허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행적을 묘사할 때 성서에 있지 않은 내용을 그려서는 안 됐다. 공의회는 신학적으로 불명확한 내용, 이교적인 내용, 신성 모독의 소지가 있는 부분 등을 허락하지 않았다.

종교재판소가 운영되면서 미켈란젤로도 피해갈 수 없었다. 문제가 된 작품은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위 벽에 장식된 <최후의 심판>이다. 황제의 명을 받고 작업한 미켈란젤로는 비난과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쟁점은 작품의 표현 방법이 외설스러워 교회의 품위가 손상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수차례에 걸쳐 작품을 수정했으며 작품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 르네상스 미술은 고대 로마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버무려 표현했다.

예를 들어 교회 벽화 작품인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는 신학자, 그리스의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시인 등 54명이 함께하는데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용기 있는 수도사의 행보는 유럽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계가 거울로 삼는 계기가 됐다. 신을 믿는 이들이라면 분명 ‘신의 역사’라고 말할 것이다. 어떠한 회유와 비난에도 흔들림 없이 소신을 지킨 루터로 신앙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