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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는데 아무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말을 지어낸다느니, 사단·마귀가 들렸다느니 정신이 나갔다느니 험한 말만 돌아올 뿐이다. 굴하지 않고 가짜와 부딪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외친다. “정신 차려!” 보는 내내 불편했다. 보는 내내 상영관을 나오고 싶을 만큼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어려웠다. 처음에는 귀를 자극하는 욕설 때문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스크린 속 상황에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감독 말대로 <사이비>는 종교 문제로만 국한해서 볼 수 없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종교영화 다시보기’에서는 ‘믿음’ 곧 ‘신심’에 초점을 맞춰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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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깨우는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사이비>는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미 제51회 스페인 히혼국제영화제 최고 애니메이션상, 제46회 시체스국제영화제 최우수 장편애니상을 수상했다. 미국 아카데미 애니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이처럼 수상작으로 지목받는 이유는 연출과 탄탄한 스토리 덕분이다.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다루는데 고발 프로그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미세한 부분까지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걸작” “2013년 최고의 영화”라고 평가했다.
 
수몰 예정지인 시골 마을 사람들이 교회 장로를 빙자한 사기꾼 최경석(권해효)의 술수에 걸려든다. 최경석의 손바닥에 놀아나는 이들은 순박한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철우(오정세) 목사도 있다. 최경석은 “이 마을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살고 있기에 마귀가 방해하는 것”이라며 마을이 수몰당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신이 택하신 14만 4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기도원을 만들고 그곳에서 영원히 함께 살자”라며 외쳤다. 최경석의 목적은 오로지 주민들의 돈이다. 정부에서 수몰예정지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보상금을 지원했는데 최경석은 이를 노린 것이다.
 
젊은 목사는 이 사실을 모른 채 하나님의 일꾼으로 기도원 설립을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소망을 심어준다. 그러던 중 폭력적인 가장이자 이웃에게도 그리 선량하지 않은 김민철(양익준)은 최경석이 지명수배자이자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다는 것을 알고 이를 파헤치기에 나선다. 신앙을 미끼로 기적을 만들어내는 최경석을 마을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다. 오히려 거짓을 고발하고 진실을 밝히는 김민철의 말에 싸늘하게 뒤돌아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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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내용이다. 흔히 고발 프로그램에서 사이비, 이단, 광신자 등을 다룰 때 쉽게 보는 구성이다. 사이비, 이단의 목자들의 목적은 돈이다. 이들에게 신을 존경하고 우러러 바라보며 두려워 하는 마음은 없다. 신앙은 관심 밖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디모데전서 6:10)’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등의 말씀은 깡그리 무시한다. 또한 개신교, 불교, 천주교 구분할 것 없이 수십 년간 존경받는 목회자, 스님들 중에서도 돈 때문에 적잖은 실망을 안겨준 이들도 있다. 유럽에서 800년경부터 15세기까지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한 교황청과 무엇이 다른가. 돈으로 멍든 종교계다.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듯, 안타까우면서도 어리석은 쪽은 분별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는 신도들이다. 맹목적인 믿음으로 신앙하는 이들을 ‘광신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치유와 같은 기적을바란다.
 

똑똑한 신앙인

한마디로 똑똑해야 한다. 지각(知覺)이 없으면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없고 수동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마을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다. 그저 순진무구했기에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신의 뜻을 알았더라면 눈 뜬 채 코를 베이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신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는 경서(經書)가 답이다. 개신교의 경서는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신서(神書)다. 그런데 이 신서를 자의적으로 풀게 되면 사이비, 이단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인데 무엇을 자의적으로 푼다는 말인가. 유독 이단 논쟁이 많은 개신교에서 ‘예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정통과 이단으로 구분한다. 성경은 크게 역사, 교훈, 예언, 성취로 나뉜다. 이미 있어진 역사와 누구에게나 잠언이 되는 교훈 부분에서 해석을 요하는 부분은 많지 않다. 문제는 예수가 다시 온다고 약속한 신약, 즉 요한계시록이다. 결국 똑똑한 신앙은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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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유대인들이 성경(구약)을 달달 외우고 있었으나 선지자들의 예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약속대로 온 메시아(예수)를 몰라보고 핍박한 것을 거울과 경계로 삼는다면 신약을 아는 것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박국 선지자는 예언이 이뤄질 때를 대비해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하박국 2:2)’고 당부했다. 현명한 신앙인은 역사, 교훈 뿐만 아니라 예언과 또 예언대로 이뤄질(또는 이뤄진) 성취(실상)를 알고 믿는 것이다. 성경대로 말이다.
 
이를 모르고 마을 주민들처럼 맹목적으로 신앙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일찍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 4:6)’라고 경고한다. 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고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이 원하는
지식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이 없는 믿음으로는 천국과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초림 때엔 하나님을 아는 목자는 예수였다. 예수는 세상 것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천국복음에 대하여 가르쳤다. 이 가르침을 듣고 예수 앞으로 나오는 자들이 참 신앙인이었다. 재림 때도 마찬가지다. 예수와 함께하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신앙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자, 이제 자신에게 물어보자. 말과 볼거리에 현혹돼 신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말 성경을 알고 믿는 것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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