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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비밀 ‘황칠’ 세상을 눈부시게 하다
세계가 먼저 눈 뜬 한국의 美
UN재활기구 세계무형문화재 기능장인 구영국 명인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흔한 구호이기는 하나 그만큼 실현되기 어려
운 말이기도 하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여기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를 놀
라게 한 주인공이 있다. 바로 백제황칠명인 1호 백사 구영국 명인이다.
- 글 백은영 사진 스튜디오1981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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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세계 최초로 UN재활기구(WRO) 세계유산보전위원회(WorldIntangible Cultural Heritage, World Heritage Preservation Commission)
에서 지정한 세계무형문화재(WICH)가 탄생했다. 그 영예의 주인공은 백제시대의 황칠(黃漆)문화를 오늘날에 되살린 백제황칠명인1호 구영국 명인으로 지난 2월 16일 세계무형문화재(WICH) 황칠분야(Golden lacquered areas) 세계무형문화재 기능장인으로 선정됐다. 세계무형문화재 기능장인 1호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유산이나 인류무형문화유산(세계무형문화재)이 관습이나 종목 등에 부여됐다면, 유엔재활기구 세계무형문화재는 그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직접 지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더욱이 UN재활기구에서 정한 세계무형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15개나 되는 항목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힘든 일이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향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다고 수상소감을 전한 구영국명인의 삶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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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만에 되살아난 백제황칠

2년 전 처음 만난 황칠은 아름다웠다. 검은 옻칠밖에 몰랐던 기자에게 황금빛이 도는 황칠은 생소하기만 했다. 백제황칠명인 1호 백사(白士) 구영국(具永國) 명인을 만나면서 황칠을 알게 됐다. 낯설기만 했던 황칠의 매력과 그 제작과정을 알고 나니 금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다. 구영국 명인과의 인연은 지금껏 이어져 세계무형문화재 기능장인 1호로 선정됐다는 소식도 제일 먼저 들을 수 있었다.

명맥이 끊겼던 백제황칠을 200여 년 만에 되살린 백사 구영국 명인. 그는 “오래 두고 보면 볼수록 금빛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 황칠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황칠은 결코 짧은 시간 내에 신기함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옻은 천년, 황칠은 만년이라고 해요. 황칠은 한 번 칠하면 천년만년 간다고 해서 천금목(千金木)이라고도 불렀어요.” 
 
옻칠보다 오래가고 그 색감도 아름다운 황칠(黃漆). 황금빛을 띠는 데다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불가나 왕가에서만 사용했다는 황칠은 귀한 만큼 그 아름다움도 빛을 발한다.

백제시대부터 사용됐다고 전하는 황칠은 황칠나무에서 얻어지는 수액을 정제해 칠을 입히는 것으로 북한에서는 노란 옻나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옻나무의 수액이 공기와 접촉하면 갈색으로 변하는 반면, 황칠나무는 금색으로 변한다. 바로 이런 특성과 소량밖에 채취하지 못한다는 진귀함에 한때는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는 수난까지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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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공예부터 황칠까지

구영국 명인이 처음부터 황칠공예(黃漆工藝)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나전칠기부터 옻칠, 전통공예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먼저 거쳤다.
그가 전통공예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고등학생이었을 당시 친구 집에서 보게된 나전칠기 장롱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어느 날 친구 집에서 우연히 나전칠기 장롱을 보게 됐는데 정말이지 눈이 황홀할 정도였어요. 머리카락처럼 세밀하게 조각되고 주름질 된 나전칠기를 보면서 탄복했다고나 할까. 그 순간 ‘저 걸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우연처럼 다가온 전통공예의 길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운명적이었다”고 말하는 구영국 명인. 하지만 전통공예의 길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1979년에 전통공예에 입문하면서 참 많이 힘들고 어려웠어요. 당시에는 전통공예에 대해 딱히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서 도제식으로 배웠죠. 심부름부터 시작해 맞기도 하면서 고생 참 많이 했어요.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고 하면 엄두가 안 날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다시 살리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배울 수 있는 기술은 다 배우고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나전칠기, 옻칠, 전통공예디자인까지 당대 최고 스승 세 분 밑에서 도제식으로 배웠어요. 디자인 작업만 10여 년을 넘게 했죠. 배워야 할 건 너무 많고, 일도 고되고,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았어요. 매일 일이 끝나면 술을 마실 정도로 앞날이 캄캄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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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의 아호 백사(白士)에 담긴 뜻이 궁금했다.

“80년 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세상이 어지럽던 시절,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서울 아차산의 깊숙한 암자를 찾았어요. 그때 한 노스님이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하얀 선비처럼 깨끗이 세상을 살라’며 내려준 아호가 바로 백사(白士)였어요. 후에 법정스님께서도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과 성품, 전통 미래와 보존가치에 있어 인품과도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셨지요.”

1985년 한남동에서 공장을 하기 시작할 때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던 그는 머리도 식힐 겸 길을 나섰다. 의도하지 않은 발걸음이 그를 전북 김제 금산사로 이끌었다. 바로 그곳에서 구 명인은 ‘황칠’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날 제가 왜 금산사에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우연히 간 그곳에서 한 노스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때 노스님이 조그만 호리병 같은 것을 하나 주셨는데 그게 바로 황칠이었어요.” 인연과 필연은 꼭 우연처럼 다가온다는 말이 있던가. 그날 그곳에서 만나 그를 황칠의 세계로 들어서게 한 노스님 또한 금산사에 잠깐 들른 길이었다고 한다.
 
“노스님께서 제게 황칠을 건네며 던진 한 마디 말이 ‘평생의 화두로 삼으라’는 것이었어요. 그때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없었죠. 그러면서 ‘이 놈이 이제야 주인을 만났다’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봐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옛날 고승(高僧) 중에는 ‘천리안’을 가진 분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노스님이 그런 분이 아니었나 싶었다는 구 명인.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난 것 같다’는 노스님의 말에 뭔가 모를 사명감이 생겼다. 황칠이 제 주인을 만났기 때문인가. 노스님은 구 명인에게 황칠을 건넨 이듬해 거짓말처럼 입적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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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의 부활, 새로움을 입다

구 명인이 전통공예를 배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길잡이가 돼줄만한 스승(멘토)이 많지 않았던 것과 제대로 된 기록이 없었다는 점이다. 의궤는 있었어도 장인(匠人)들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후대에 와서 그 전통을 되살리는 일이 어려웠다고 한다.
“황칠공예의 맥이 끊어진 게 한 200년 정도 돼요. 일제강점기 때는 황칠나무 잎만 따가도 잡아간다고 할 정도 황칠은 정말 귀한 재료였어요. 일제가 우리네 황칠나무를 가져가 심기도 했지만 기후가 안 맞으니 잘 자랄 수가 없었죠.” 황칠은 원래 한국, 중국, 일본 삼국에 있었지만 종이 다르다. 1속1종의 황칠은 전 세계에 우리나라밖에 없는 순수 토종이다. 옻은 중국에서 넘어온 것이지만 황칠은 오롯이 우리네 땅에서 자란 우리 민족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이미 당나라 때 황칠 맥이 끊어졌고 일본도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해요. 한국 황칠이 좋다고 소문이 나니 뺏어가려고 안달이 났던 거죠. 병자호란때는 청나라에서 ‘조선은 황칠을 쓰지 말라’고 명령까지 내렸었다고 하니 황칠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죠.”

이토록 귀했던 황칠. 너무도 진귀해서 중국의 황제만 사용하려 했던 황칠이 오늘날 구 명인에 의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금산사에서 만난 노스님께 황칠을 건네받은 지 15년의 세월이 흐른 뒤다.
“노스님이 당부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비밀리에 연구하라는 말씀이었죠. 제대로 된 황칠을 선보이기 전에는 함부로 내보이지 말라는 당부였죠. 황칠이 왕실공예였기에 더욱 신중을 기하라는 약조였어요.”
옻, 나전칠기, 전통공예 디자인을 하면서 남몰래 황칠을 연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술도 많이 먹었다.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연구하면서 비밀을 지키는 일이라 그야말로 곤욕이었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거쳐 황칠을 세상에 처음 선보인 게 2000년도 초반이다.

“황칠의 어려운 점이 어떻게 칠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황칠을 연구하며 터득한 비밀을 다 기록해놓았어요. 나중에 이 황칠을 이어갈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 길을 제대로 닦아야 해요. 그게 후대를 위해 오늘날 우리와 같은 전통공예 장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지러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선비처럼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백사 구영국 명인. 그는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것 못지않게 전통에 바탕을 둔 창작 또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골프퍼터의 세계명품 브랜드 칼라미티 제인(Calamity Jane)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스페셜에디션 황칠 퍼터를 제작하기로 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는 또한 한국전통공예의 세계화의 일환으로 구 명인은 퍼터로 시작해서 다양한 골프용품을 황칠과 접목할 계획이다.
그는 골프퍼터 이전에 이미 서울디자인센터에서 일부 연구비를 지원받아 전통공예디자인 콜라보레이션과 공예디자인 접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황칠자동 차핸들을 개발, 제품화하기도 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전통공예 장인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구영국 명인. 발명특허 2개와 디자인 등록 1개를 소유하고 수십 회에 달하는 초대 개인전을 열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그이기에 세계최초로 UN재활기구 세계무형문화재 기능장인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앞으로 세계를 향해 선보일 우리의 전통문화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