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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삶,
거기서 만나는 책

안찬수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인터뷰


글. 김일녀 사진제공. 책읽는사회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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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이름답게 사무실은 책으로 가득했다. 제법 넓은 규모였지만 대형 서점보다 헌 책방에 온 듯 느껴졌다. 정리되지 않은 책 무더기가 곳곳에 쌓여 있고, 책을 칸막이 삼은 직원들의 책상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책에 파묻혀 있는 ‘책읽는사회 문화재단’. 그곳에서 안찬수 사무처장을 만났다. 10년 넘게 이 재단을 이끌어온 그에게서 ‘책 읽는 사회’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현주소에 대해 듣고 싶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때, 지나간 시절이나 다가올 시절이나 크게 달라질 게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그려보는 것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아무 대가 없이 삶의 지혜와 지식을 나눠주고 또 깨우쳐주는 책은 언제든 활짝 열려 있다. 문제는 누가, 얼마나 찾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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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실
 


   

2004년, 그를 이 재단으로 이끈 사람은 책읽는사회 문화재단 상임대표인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다.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권유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안 처장 또한 문학도였다. 시를 전공했고, 시를 썼다. 여러 권의 번역서도 냈고 출판 편집기자로도 일했던 30대. 그때는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고 했다.

재단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2001년 출발했다. 당시 IMF를 겪은 이후 사회 전반은 선진국을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기반이 형성돼 있는가’에 대한 물음표가 일었고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재단을 만들게 됐다.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있든 없든 시민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공공도서관이 기본적인 인프라로 갖춰져 있어야 하고요. 이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 제도적인 시스템, 즉 형식만 갖췄다고 민주사회가 되긴 어렵다고 본 것이죠.”

물론 당시 공공도서관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2001년 기준 전국에 450개가 안 됐다. 인구 약 10만 명당 도서관 1관 꼴로 턱없이 적었다. OECD 국가들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낙후된 수준이었다. 당시 유럽은 인구 1만 명당 1관, 미국·일본도 3만 명당 1관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에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공공도서관을 제대로 갖추고 확충해야 한다고 주창하고 나섰다.

“시민들이 활자로부터 이탈되고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매체 변화의 문제가 아니예요. 읽는 문화 자체가 위축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결국 사회 구성원 전반이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위기에 처한 사회라고 본 것이죠.”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신문, 방송사 등과 함께 여러 캠페인을 벌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MBC ‘느낌표-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프로그램이었다. 2001년 겨울에 시작해 2003년까지 2년여간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사회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세워진 ‘기적의 도서관(어린이 도서관)’은 현재 전국에 12개가 세워졌고, 지금도 지속 추진 중이다. 그 과정에서 기부금, 후원을 통해 도서관을 짓다 보니 2003년 재단 법인체를 만들게 됐다. 재단의 시초는 9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출발한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이었다.

“죽고 나서야 결과가 나타날 일”

재단이 시작된 지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공공도서관은 2배로 늘었고, 도서관당 인구수도 1관당 6만여 명(2013년 기준)으로 크게 줄었다. 공공도서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커졌다. 지금은 각 지자체가 문화정책을 펼 때 도서관에 대해 고민하는 수준까지 왔다고 한다.

물론 그는 “독서환경이나 도서관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교육열은 높지만 책 읽는 문화수준은 높지 않은 이 나라… 오랜 기간, 아니 20세기 들어서만 봐도 식민지에 이어 전쟁을 겪었고, 이후에는 군사 독재로 인한 권위주의 시절을 보내면서 책 읽는 것이 익숙지 않은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창시절 책을 읽긴 하지만 워낙 입시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책 읽는 습관이나 책 읽는 즐거움이 자리잡지 못했다고 했다.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에게도 이렇게 이야기 하죠. 우리가 하는 일의 성과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나타날 거라고…. 세상은 확 바뀌지 않아요. 하지만 더디게 가더라도 조금씩 진전시키려 하고 또 뭐라도 촉발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세월이 흘렀네요.”

그는 스스로를 우둔한 곰 같다고 했다. 덕분에 10년 넘게 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삶에서 딱 한 권의 책을 꼽는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마하트마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2002)>를 꼽았다. <자서전>과 더불어 간디의 주저 중 하나로, 그가 초고했다. ‘인도의 자치’라는 뜻의 이 책은 간디가 마흔 살에 쓴 에세이 전집으로,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다 인도로 귀국하던 시기에 자신의 생각을 표명한 일종의 ‘출사표’다. 지금의 근대문명, 정치제도, 기계문명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가 담겼다고 한다. 이 책에서 그는 무얼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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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누아르‘ 책읽는 소녀’
 


“간디는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표명했어요. 영국인들과 갈등이 있을 때도요. 제가 80년대 학번인데, 당시 군사독재 시절이니 만큼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일하고 했어요.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하면서 ‘세상에 참된 일이라면 감출 이유가 뭐가 있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밝히는 게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됐죠. 지금 우리 사회나 문명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점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죠.”

책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
그는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이라고 했다. 책을 쓰는 주체도 읽는 주체도 사람이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이라고 했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질문. 이 질문에 정답은 없으나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이라고 했다.

“외부에서 던져지는 질문이 아닌 자기 안에서 나온 질문으로 말미암아 만나게 되는 책은 거듭해서 읽게 되죠.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그런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죠. 하지만 그런 책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빨리 읽는 것도, 천천히 읽는 것도, 정독이나 다독도 책 읽기에서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몇 년 전부터 붐이 일어난 ‘인문학’ 열풍도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 하나라고 했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에 대한 탐구, 즉 사람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 속에서 스스로 의미 있는 답을 찾을 때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는 소가 송아지를 낳는 모습을 본 이야기를 꺼냈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발딱 일어서고, 곧 여물도 먹는다. 몸집만 작을 뿐 금방 소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다. 굉장히 더디게 성장해 요즘 같으면 20년은 물론이고, 30년은 돼야 사람 꼴을 한다는 것이다. 순간 어린 시절 집에서 항상 들었던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대들고 못되게 굴 때마다 들었던 그 말. 다행히(?)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책을 좀 더 가까이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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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도서관
 


“시골에서 학교가 유지될 수 있을까 싶은 곳에서도 아이들은 계속 커 갑니다. 그런 곳에 도서관을 지원해주어 아이들이 책과 만날 수 있게 해주고, 그들의 가능성을 열어주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는 게 재단의 역할이죠.”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만들고, 그러한 환경을 갖춘 사회를 만드는 게 궁극적으로 재단이 지향하는 바다. 그만큼 일의 결과가 바로바로 나타나진 않는다. 하는 일도 크게 바뀐 게 없다. 그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꾸준히 추진해가고 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공공도서관 정책을 펼 수 있도록 돕고, 제안도 한다. 구체적으로는 병원도서관 조성과 소외 지역의 학교도서관 역량 강화, 영유아에게 그림책이 든 가방을 선물해 책 읽는 가정 문화의 조성을 돕는 ‘북스타트’,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즐겁게 책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사 연수 등이 있다.

언젠가 더이상 재단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은 시점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는 담담했다. 한발짝 더 나아가 ‘지금 거의 임계점에 와 있다’고도 했다. 연초 큰 화제가 됐던 알파고와 이세돌 간의 바둑 대결이 단적인 예라면서, 지금까지는 축적된 각종 데이터를 검토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간의 몫이었는데 알파고, 즉 인공지능 컴퓨터도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처럼 주어진 지식만을 받아들이고 학습하는 식으로는 살기 어려운 세상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라고 했다. 다만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은 몸을 쓰고 또 머리와 마음을 쓰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활동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히려 머리와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을 길
러내고, 그런 사람들로 사회가 움직여지기 위해 책읽기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도 활자나 책은 없어지지 않아요. 전 세계적으로 매년 신간이 더 늘어나고 있죠. 생각의 힘을 키우는 것, 즉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키우는데 책읽기 말고 뭐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