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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세상을 꿈꾸다


사람들을 향해 “맛 좀 볼래?”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얼핏 들으면 시비를 거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의 숨은 뜻을 알고 나면 ‘맛’ 좀 보고 싶어진다.
대한민국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미맹(味盲)이 됐다며 안타까워하는
커피 전문 카페&유통 ‘가비양(GABEE YANG)’의 양동기 대표.
그가 ‘맛’ 좀 보여주고 싶은 세상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백은영 사진. 박선혜,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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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느낄 수 없는 상태 미맹(味盲). 가비양 양동기 대표는 사람들이 미각(味覺)을 잃어 음식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혀가 살아 있다면 자신이 느끼는 맛을 말로 설명할 수 있지만, 맵고 자극적인 음식에 익숙해진 혀가 더 이상 맛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맛집을 소개하는 블로그나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도 스스로가 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맛을 모르기에 남의 혀(입맛)에 ‘맛’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양 대표의 말이다.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맛을 모르는 상태에서 머물지 않는다. 맛을 모르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대화의 단절까지도 올 수 있다는 게 양 대표의 주장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미각을 찾아주고 싶다는 그. 대한민국이 미맹에서 벗어날 때 보다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다.

하늘빛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지난 5월, 양 대표를 만나기 위해 분당에 있는 카페 가비양을 찾았다. 푸르른 5월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게 햇살도 알맞게 내리쬐던 어린이날 오전. 가족과 함께해야 할 시간을 뺏은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앞섰던 기자에게 편하게 인사를 건네는 양동기 대표. 짧은 순간이었지만 얼굴에 만연한 미소와 재치 있는 입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모습에서 그가 사람을 좋아하고,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려 손님들에게 바로 맛보일 수 있는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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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맹(味盲)에서 벗어나
맛을 표현하라


양 대표가 커피를 핸드드립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처음부터 물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또록~ 또록’ 조금씩 떨어뜨린다. 물어보니 커피와 물이 서로를 만나 어우러질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 방울, 한 방울 물을 머금고 내려지는 커피가 커다란 소라껍데기에 담기는 모습이 마냥 새로웠다. 지인에게 선물 받았다는 소라껍데기도 신기했지만, 커피를 와인잔에 담아 맛보게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와인잔은 일반 찻잔보다 커피 향을 더 잘 맡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향이 살아 있는 좋은 커피는 이렇게 와인잔에 담아 마시면 커피의 맛도 더 잘 느낄 수 있죠.”


능숙한 솜씨로 커피를 내려 맛을 보라며 와인잔을 건네는 양 대표. 그가 처음 맛 보여준 커피는 콜롬비아산 ‘나부시마케’다. 하늘과 태양과 구름과 바람이 만든다는 커피. 나부시마케는 원종에 가장 가까운 커피나무 ‘티피카’에서 유기농 방식으로 탄생한 커피다.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 영향으로 남미 대륙 중 가장 혼혈인종이 많은 나라지만 그 가운데서 자신만의 혈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르아코족. 이들은 대지를 어머니라 부르며 대지를 지키기 위해 땅 위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도 함부로 자르거나 옮기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들이 대지의 어머니를 지키며 살아가면 그들 또한 그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그땅에서 좋은 것을 얻으며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나부시마케’다.


“맛이 어떤 것 같아요? 표현해 봐요?” 예상은 했었지만 커피 맛을 물어오니 선뜻 표현할 재주가 없었다. 무엇이라 표현은 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기자의 말에 “맛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잘 익은 귤에서 나는 신맛과 허브향….” 등 커피맛을 표현하는 데 있어 다소 생소하고 낯선 말들이 양 대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순간, “내 혀가 이렇게까지 둔했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해야 맛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이 됐다.

“혓바닥이 죽어 있으면 ‘맛있는 것 같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맛있어요’ ‘맛없어요’라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혀가 살아 있으면 왜 맛이 있고, 맛이 없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이러이러한 향이 있어서 좋다’든가 ‘이 부분에서 요리를 어떻게 해서 좋다’ 등 구체적인 이유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혹자는 맛있으면 그만이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양 대표는 바로 이 부분을 꼬집었다. “예를 들어 커피가 있어요. 이 커피가 왜 맛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면 커피를 느끼고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에티오피아의 해발 2000m가 넘는 곳에서 야생하는 예가체프가 있어요. 얘네들 정말 비참하게 살아요. 낮에는 33도까지 올라갔다가 새벽에는 7도까지 내려가죠. 자연이 날마다 흔들어버리는 거죠. 이 극한의 스트레스를 이겨낸 애들이 품은 향이 어떤지 한 번 맛을 보세요. 사람하고 똑같아요.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고 이겨낸 사람이 깊이가 있듯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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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문화를 만들다
문화, 인문학을 꽃피우다


‘그랑크뤼’가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으로 꼽히는 이유는 포도밭을 둘러싼 기후, 토양 등 제반 자연 환경이 좋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테루아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풍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극한의 스트레스에서 살아남은 커피나무. 거기에서 얻어진 커피는 단맛과 신맛의 발란스가 아름답다. 양 대표에 말을 빌리자면, 목에 들어가면 허브향이 만발을 하고 마시고 나면 여운이 남는다. 커피 그 본연의 맛을 혓바닥이 느끼고 영혼이 느끼는 것이다.

“전 세계 지식인들은 커피를 달고 살았어요. 한 예로 베토벤은 커피 한 잔(10그램)을 위해 원두 60알을 새서 갈아 마셨다고 하죠. 커피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놀랄 거예요. 술 취한 유럽을 커피가 깨웠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커피가 들어가기 전에는 차문화가 없었죠. 술에 취해 있는 이들을 깨운 건 커피죠. 커피가 들어온 순간 이들은 서재로 들어갔고 지식의 문이 열리게 된 거죠.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정보가 모이게 되고, 정보가 모이게 되니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거죠.”

조선왕조 500년의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 연회장에서 시를 읊을 수 있는 민족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민족이 바로 그랬다. 사람이 모여 흥이 오르면 시를 읊고 답가를 서로 주고받기도 했다. 임금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 인문학이 발달한 나라. 바로 우리나라였다. 아쉽게도 과거에 그러했다는 것이다. 근본이 있는 선비의 나라. 높은 정신세계를 향유했던 우리 민족의 현실은 ‘인문학의 부재’가 화두가 되고 ‘빨리 빨리 문화’가 특징이 되어버렸다.

“고춧가루처럼 맵고 자극적인 음식에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혀가 기능을 상실한 거죠. 그러다보니 성격도 급해지고, 참을성도 줄어든 거죠. 커피 한잔 즐길 여유가,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사라져버린거예요. 차문화가 대한민국 사회에 자리를 잡아야 해요. 서로 대화하며 생각과 정보를 공유하다보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기게 되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대화가 토론이 되고, 결국엔 인문학이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고 믿어요.”


공학도, 커피를 만나다

1997년 ‘가비양’을 시작해 커피와 함께 생활한 지올해로 20년이 된 양동기 대표는 사실 일본의 한 전자대학에서 인공지능을 공부했던 공학도다. 커피원두 납품회사를 운영하던 큰형님의 권유(?)로 전공과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예고 없이 찾아온 길이지만, 그 길 위에서 양 대표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커피, 가장 착한 커피를 찾고 만들기 위해 일 년에도 몇 번씩 세계 오지를 탐방한다.

“스페셜티(Specialty) 커피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페셜티 커피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나부시마케’를 찾아 사람들에게 맛보일 수 있었던 것도 좋은 커피를 찾기 위한 그의 진심이 아르아코족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나는 콩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결국 커피는 사람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니까요.”

그의 이 말이 아르아코족을 움직였고, 그 결과 우리는 커피로 지켜낸 ‘순수’의 이름 ‘나부시마케’를 음미할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이 잃어버린 미각을 찾고, 미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고로 아름다운 향을 머금은 ‘착한커피’를 맛보여주고 싶다는 가비양 양동기 대표.

커피 한 잔에서 시작되는 인문학의 부활을 꿈꾸는 그가 ‘가비양 클럽’을 통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선보이는 이유도 사람들에게 ‘맛 좀’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가비양 양동기 대표의 ‘맛 보여주고 싶은 세상’을 작게나마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