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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황제 고종의
급작스런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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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광무(고종)황제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서거했다. 갑작스러운 광무황제의 죽음은 독살의 의혹으로
번졌다. 당시 황실의 전의(典醫) 한상학과 종친 윤덕영이 식혜에 뭔가를 타서 광무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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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A 한국 특파원이던 앨버트 테일러가 1919년 3월 3일 촬영한 고종 황제의 국장 장례 행렬. 대나무를 엮어 종이를 붙여 만든 죽안마(竹鞍馬)는 장례행렬을 이끄는 의장품으로 왕과 왕비의 국장 행렬에만 사용된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1월 21일 서울에서 발행하는 일본어신문<경성일보>가 긴급 호외를 발행했다.

“전 황제 이태왕(李太王) 즉 이왕(李王)의 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뇌일혈을 일으켰고 그 상태가 매우 위중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도 ‘태왕 전하 중태’라는 제목으로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곧이어 왕실의 전속 의사인 전의 김형배(金瀅培), 촉탁의 가미오카 가즈유키(神岡一亨)와 안상호(安商浩) 세 의사가 전황제의 경과에 대해 진단서 형태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수일 전부터 불면증이 있으셨는데, 21일 새벽 1시 45분에 살짝 잠이 드시려던 중에 돌연 오른쪽 반신에 고통을 느껴 깨시고 곧 왼쪽에도 통증을 느끼시다… 오전 2시 15분에 같은 발작이 약 3분간 있으신 후 6시 35분까지 경련이 10회나 계속되면서 발작이 점차 격심하여져서 의식을 잃고… 중태에 드셨다.”

1월 22일 천주교 뮈텔주교는 광무황제가 공식 발표 전날인 1월 21일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다음 과 같은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전 황제가 사망한 것이 확실하고 이미 어제 아침에 사망했다고 주장하고들 있다. 일본인들은 25일로 예정된 이 왕세자의 결혼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누설한 소식으로 그 비밀이 지켜질 수 없었다.”(<뮈텔주교 일기> 6, p. 244.)

전남북 지역 시찰 중이던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타로(宇都宮太郞) 중장은 1월 21일 저녁 광주에서 지역 기관장들을 초청한 만찬 도중 경무부장 헌병대좌 후지타 고이치(藤田耕一)로부터 전문을 통해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기차로 서울을 향해 오면서 이왕직 장관 민병직과 통화하여 전 황제가 공식 발표보다 만 하루 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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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 9. 25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총독부 관리로서 왕실을 관리하는 관청인 이왕직 궁내관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1월 21일 새벽 2시에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덕수궁에는 전 황제의 근친과 가족들이 벌써 별실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10분쯤 후 순종이 2~3명의 시종무관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부터 도착했다.

그는 “그러나 광무황제는 이미 숨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광무황제의 서거를 하루 늦추어 발표한 것은 나흘 뒤로 다가온 영친왕 이은(李垠)과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마사코(方子)의 결혼식을 예정대로 진행해야 할지 어떻게 할지 서울과 도쿄 사이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광무황제의 죽음은 독살의 의혹으로 번졌다. 당시 황실의 전의(典醫) 한상학과 종친 윤덕영이 식혜에 뭔가를 타서 광무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병합 때 자작 작위를 받았던 민영휘는 광무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궁으로 달려갔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달려갔을 때 이미 황제는 전신이 마비되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황제는 양위탕(養胃湯) 한사발을 먹고 난 후 한 시간도 못되어 현기증과 위
통을 호소했다. 황제는 죽어가면서 내 두 손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던지 환관인 나세환이 두 사람의 손을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1919. 2. 11, pp. 72~73) 이런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던 윤치호는 1919년 11월 29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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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 고종 황제 장의 행렬
 

“난 지난 2월만 해도 고종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난 그들에게는 고종황제를 독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민병석, 윤덕영 일당이 고종황제의 마지막 처소였던 덕수궁을 일본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난 이제 그 얘기를 믿게 되었다. 이 악당들은 자기들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야비한 놈들이다.”(<윤치호 일기>, p. 157) 고종황제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자 덕수궁 대한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1월 23일에는 아침부터 대한문 앞에 전날의 배가 되는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모여 문 앞에 펼쳐 깐 거적자리에서 하늘에 사무치게 통곡하는 소리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여인들도 다수 와서 엎드려 호곡하고는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각 조합기생들도 떼를 지어 와서 통곡하며 재배(再拜)를 하였다.(<매일신보>, 1919. 1. 24)

일제 헌병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1월 22일 ‘돌연히’ 이태왕(일제는 광무황제를 이렇게 불렀다) 승하의 소식이 발표되자, 상하 모두 그 갑작스러운 부음(訃音)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경기).”

“이태왕 전하의 승하의 보가 전해지자 상하 일반이 경악하였다(충북).”는 보고가 잇달았다. 유신영(1853~1919년)이라는 노인은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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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앞에서 고종황제 서거를 애도하는 군중
 


“나라가 없으나 임금은 있어 복국(나라를 되찾는 것: 필자)될까 기다렸더니 시방은 상황 돌아감이 쓸 데 없으니 어찌 사노. 이러므로 인산날로 죽기 작정하니 세상은 하직이로다.”(독립기념관 소장자료, No. 3018)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승하한 광무황제에 대하여 충성심을 보이는 데 깜짝 놀랐다. 전국의 모든 관리들에게 소요의 조짐이 있는지 잘 감시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또한 최대한 빨리 조선인들의 눈과 마음속에서 충성의 대상을 제거하기 위해 서둘러 장례를 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실종친들은 오랜 논의 끝에 장례 날짜를 3월 3일로 정했다. 42일장인 셈이다.

서거 5일 후인 1월 27일 광무황제의 장례를 국장으로 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그날부터 29일까지 3일간 애도의 표시로 가무음곡을 금지했다. 이어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朗),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 공작 이토 히로구니(伊藤博邦)와 이완용을 공동 장의위원장으로 하는 장의위원이 발표되고, 2월 13일에는 장례 행렬이 덕수궁에서 황금정(현 을지로)을 거쳐 훈련원(현 국립의료원)으로 이동한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장례식은 3월 3일 오전 8시 30분 덕수궁 발인의식에서부터 훈련원까지 운구는 일본식으로, 10시 훈련원 장례식 이후 장지인 남양주 홍릉까지의 운구와 매장은 조선 예법에 따라 거행하게 되었다.

황제의 장례식 도중에 소요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야기들로 시중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윤치호는 1919년 1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윤치호 일기>, p. 69)

민족대표의 일원이며, 1918년 초부터 민중봉기를 주장해 왔던 이종일(李鍾一)은 이런 새로운 사태를 맞아 자신의 생각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당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대한인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일대 요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민중시위 구국운동은 이제 진정한 민중운동으로 성숙될 것이다. … 이 운동에 아니 참여할 자가 있겠는가.”(<묵암 이종일 선생 비망록(4)>, <한국사상>19, 1982, p. 226) 추모의 정서는 전 국민적인 것이었다. 지방마다 주민들은 양반·유생 주도하에 흰 갓을 쓰고 황제의 죽음을 추도하는 망곡식(望哭式)을 했다. 경북지방 1부 23군에서만 230개소에서 망곡식이 있었다. 한 군(郡)당 10곳에서 추모 행사가 있은 셈이었다. 3월 3일 국장일이 가까워오자 황제의 국장을 참관하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멀리는 경남·전남지방으로부터 양반, 유생, 기타 지방 유력자로서 상경하는 자가 뒤를 이었고, 기차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은 육로로 밤길을 걸어서 간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는 5~6명씩, 10여 명씩 단체로, 아니면 배로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많은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고 있던 상황을 후에 국어학자가 된 당시 20대 초반 회사원 이희승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며칠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인산(因山)을 구경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러한 인산은 그 의의와 행렬도 굉장하려니와 일반 국민은 한평생 이러한 기회를 얻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구경은 불가불 한번 하여 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극빈자가 아닌 이상, 서울로 오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필자의 가족도 상경한다는 통지를 받고, 서울역에 마중을 나갔던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직접 본 광경이지만, 서울로 밀려드는 승객을 운반하기 위하여 임시열차가 뼘들이로 도착하였으며, 서울역 출구에서는 인파가 마치 폭포수 모양으로 줄을 대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길이 없어, 여관들은 물론 초만원이요, 연줄이 닿는 친지의 내방으로 인하여 누구의 가정에서나 손님 사태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고도 시내의 대소도로의 노면에는 노숙하는 사람들이 또한 굉장히 많았었다.”

“당시에는 국상 중일, 남자는 백립(白笠 : 흰 삿갓)에 흰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여자들도 흰 저고리 흰 치마로 차리었으므로, 어디를 가나 인파를 이룬 곳은 순백 일색이었다. 그 광경은 만경창파(萬頃蒼波)가 아니라 실로 만경백파(萬頃白波)의 장관이었다. 기회는 대단히 좋았었다. 밖으로부터 민족자결의 선풍이 불어왔고, 안에서는 서울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있었으므로, 어떠한 운동이나 거사를 하기에는 천재일우의 절호한 기회였던 것이었다.”(<내가 겪은 삼일운동>, 동아일보사, <삼일운동 50주년 기념논집>, p. 399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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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
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