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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작가
 


설치미술가 이은숙,

‘실’로 풀어가는

자유·평화·통일의 그 날 苦待

분단·이산가족 아픔 ‘실’로 표현
‘광복 70년’ 남북 잇는 퍼포먼스


글 사진 박선혜 사진제공 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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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상
촬영 김미라 기자
 




의자, 벽, 글자, 소품, 액세서리… 그의 손을 거치면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양한 입체 조형물이 탄생한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정확한 계산의 설계도부터 한 땀 한 땀바구니 엮듯 꿰어서 입체 조형물 하나하나를 완성한다. 오로지 세 가지 형광실과 투명 폴리에스테르 필름만 사용해 자신의 내면을, 또한 바람을 설치미술로 표현해낸다.

올해로 60세. 여전히 자신만의 설치미술 작품 세계를 창조해나가고 있는 이은숙 작가. 한국에서보다 독일에서 먼저 실력을 인정받고 해외에서 더욱 이름을 알린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기초를 닦았다고 생각해요. 저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을 기억하듯 ‘설치미술가 이은숙’을 기억할 큰 프로젝트 몇 개는 죽기 전에 남기고 싶어요.”

태풍이 잠시 주춤한 지난 7월의 어느 날, 국내외를 오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충남 아산 끝자락 한적한 곳에 있는 작업실을 찾았다. 연둣빛으로 물든 너른 밭이 펼쳐지고, 목제 테라스가 어울려 그림에서나 볼 법한 운치 있는 곳이다.

“집이 굉장히 운치 있고 예뻐요.”

“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집이에요. 한국에 오면 이곳에 머물며 작업을 해요.”

아버지가 남긴 이 집은 작가의 작업 공간이다. 두어 칸 되는 방마다 작업하던 모습 그대로다. 언제든 작업을 할 수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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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작가는 3색의 형광실로 작품 활동을 한다.
 


생전에 그의 아버지는 딸이 하는 일을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도 원래는 가정대를 가려고 했고, 현모양처가 꿈이었단다. 그런 딸이 밥벌이도 시원찮은 예술을 하겠다고 하니 탐탁지 않았을 터.

“가정대를 나와서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라면 꿈이었죠. 그런데 고등학교 선생님이 자수과를 가보라 권유하셨어요. 당시 자수과는 지금의 섬유예술과에요. 가정대가 아닌 미술대였죠.”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섬유예술과를 졸업(1979년)했다. 섬유 전공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을 접하게 됐고, 실을 부드럽게 사용하는 섬유예술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실을 주재료로 하는 작품을 하게 됐다. 이후엔 홍익대 산업 미술대학 공예과를 석사 졸업(1983년)했다.

“섬유예술에서 설치미술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

“그때 얘기를 많이 하고 싶지 않지만…, 첫 개인전 준비를 하다 화상 사고를 입었어요. 3년 동안 외출을 못 했고, 의사로부터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된다는 말도 들었죠. 작가가 손을 못 쓴다는 것은 치명적이잖아요. 장애가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반드시 작품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컸죠. 왼손과 두 발로도 할 수 있다는 의지요.”

작가는 8번의 성형수술을 통해 다행히 오른손을 조금이나마 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 반대도 무릅쓰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간절했던 그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은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슈퍼마켓에서 진공으로 포장된 것을 보고 문득 ‘실을 압축해 투명하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품 개발을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투명 폴리에스테르 필름에 형광실을 압착한 입체 모형이다.

“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실풀이는 영혼을 위로하기도 하죠. 실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역할도 해요. 또 실타래에 묶여 있던 실은 점차 풀어지면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죠. 매듭을 지을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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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투명 폴리에스테르 필름에 실을 자유롭게 풀어 압착한 것을 기본 재료로 다양하게 준비해 놓고, 이것을 바구니를 엮듯이 하나하나를 잇거나 꿰어서 입체 조형물을 완성한다. 그리고 설치 후에 블랙 라이트(black light)를 써서 형광실이 조명과 어울려 신비롭고 아름답도록 연출한다. 블랙 라이트는 형광 물질에 대한 효과가 크기 때문에 조명 등의 분야에 쓰인다.

이 작가는 블랙 라이트만 쓰는 작가들이 독일에서 여는 전시(2003년)에 함께하게 돼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안고 있는 독일과 인연을 맺었다.

2005년에는 독일 분단선이 있는 곳에 집 짓는 작업을 했고, 2007년에는 ‘사라진 베를린 장벽’이란 주제로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브루크 문 앞에서 베를린 장벽을 형상화한 높이 4.5m 길이 25m의 대형 설치물을 선보였다.

특히 베를린 장벽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은 당시 현지인을 비롯해 언론과 설치미술계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작품은 한국 이산가족 5000명의 이름과 사진을 형광실과 조명으로 투영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장벽 조형물 앞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한 가족은 해마다 장벽이 무너진 날을 잊지 않기 위해 그곳을 항상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또 어떤 분은 아버지(작가의 아버지)도 북에 있는 자식을 만나길 바란다며 실제 장벽 조각 큰 것 하나를 줬어요. 아버지는 결국 북에 있는 자식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요.”

그는 조금 특별한 가족사를 안고 있다. 6·25 한국전쟁 때 그의 아버지는 함경남도 함흥에 자식 넷과 부인을 남겨두고 남한군에 들어가 싸웠다. 전쟁이 끝났으나 그의 아버지는 영영 고향 땅을 밟지 못하게 됐고, 이후 거제도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나 새 가정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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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작가 작품(2007 Berlin wall)
 


그래서 이 작가는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분단은 이 작가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그는 정전 60년의 해였던 2013년에 파주 임진각 철조망 앞에 한글을 형상화한 가족이름 조형물을 설치해 분단의 아픔을 표현했다.

이어 2014년에는 홍콩에서 ‘소통의 의자’라는 주제로 800개의 의자 작품을 쌓았다. 현대사회에서 휴식의 부족함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대화의 중요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또한 시민들이 직접 이 작가가 만든 의자 작품에 앉아 보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소통’했다.

2005년부터 ‘분단’과 ‘이산가족’을 주제로 쉼 없이 10년의 길을 오롯이 걸어왔던 이 작가. 그런 그가 또 다른 퍼포먼스 작업을 한다.

8월 15일. 올해 광복 70년의 해를 맞아 ‘자유, 평화, 통일’을 주제로 독일 베를린에서 남한과 북한을 실로 연결하는 행위예술을 한다.

구 서독에 있는 베를린 남한대사관에서 구 동독에 있는 북한대사관까지 남과 북을 상징하는 2개의 실타래를 등에 메고 땅에 풀어 놓으며 참가자와 함께 3.8㎞를 행진하는 것이다.

“처음 아이디어는 베를린에 있는 남한대사관 국기와 북한대사관 인공기를 연결하려 했는데, 담을 넘으면 북한으로 가게 돼 대한민국 법에 걸린다고 해요. 북한대사관까지 가서 실로 연결한 것을 묶고 싶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작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전시를 하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후원금을 받는 문제가 작품 제작 기간보다 더 길다고….

“작업 시간보다 후원금을 모으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려요. 한국에서 어떻게 후원을 받느냐에 따라 내가 설치미술을 선보일 수 있고 없고가 달린 거죠.”

그가 독일이나 미국 등에서 활동을 더욱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 이러한 후원금 문제도 포함된다. 또한 설치미술가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식이 그리 후하지 않은 것도 있다.

“한국에서 15년간 열심히 공부했어요. 하지만 30년 전에는 이런 재료(실 등)를 쓰면 혹평뿐이었어요. 값비싼 재료를 쓰면 작품도 값비싸고, 값싼 재료를 쓰면 작품도 값싸게 여겼죠. 하지만 그 기준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나는 재료의 특성을 살리는 예술가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독일은 재료의 특성을 살려 작품에 맞도록 작업하는 것에 굉장히 중요성을 둬요. 한국에서 열린 공모전마다 떨어졌지만, 외국 공모전에서 당당히 상과 상금을 받아 작업할 수 있었죠.”

그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나 창작활동을 펼쳤지만, 지금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싶단다. 한국에서도 많은 기회가 있으면 더욱 좋겠다고 덧붙여 말하는 그다.

이 작가는 올해 11월에도 뉴욕에서 전시를 연다. 또한 내년 봄에 경기도 파주에서 전시를 또 계획하고 있다.

“내 작업의 출발은 나의 가족이야기로 시작을 했어요. 앞으로는 전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많은 영혼을 위로하는 작업을 이어갈 겁니다. 설치미술은 작가가 어디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의 짧은 머리 옆으로 길게 땋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8년을 길러 땋고 있다는 그. 일종의 ‘타이머’란다.

“미국에 있으면서 아메리칸인디언에 대해 들었어요. 미국의 역사에서 제일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아메리칸인디언이에요. 예를 들면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희생당한 사람보다 아메리칸인디언 희생자가 더 많다고 해요. 지금은 2% 남은 사람들이 대를 이어오고 있는 거죠.”

그는 앞으로 8년 전에 ‘10년 타이머’로 계획했던 ‘아메리칸인디언 프로젝트’를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다. 열정이 느껴졌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다. 누가 알아주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것뿐이란다. 그래서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처음에 했던 그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이은숙 작가

이화여대 미술대학 섬유예술과 학사(1979)
홍익대 산업 미술대학 공예과 석사(1983)

수상이력

인터네셔날 파이버아트 외국인 특별상(1995)
인터네셔날 파이버아트 혁신적 재료상(1997)

주요 프로젝트
- Hong Kong, Hong Kong(2014)
- DMZ Paju, Korea(2013)
- Berlin, Germany(2007)
- Potsdam, Germany(2006)
- Frankfurt, Germany(2005)
- Richmond, Canada(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