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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를 꼬아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지승공예(紙繩工藝)라고한다. 그 옛날 가마 속에 놓여있던 요강 또한 한지를 꼬아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한지로 만든 것이 어찌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한지를 일일이 손으로 꼬아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을 하면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견고한 생필품이 탄생한다. ‘견오백 지천년’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비단은 오백년 가고, 한지는 천년이 간다는 이 말처럼 한지로 만든 공예품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견고함을 자랑한다.
 
지승공예의 명인 경록(鏡錄) 홍연화 선생을 만나고 나서야 가마 안에 놓여있던 요강이 지승(紙繩)공예품임을 알았다. 가볍기도 하거니와 재료의 특성상 소리도 요란하지 않아 여염집 규수들이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홍 명인을 만나기 위해 분당 야탑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 ‘고운(故雲)한지공예’를 찾았다. 작품 작업 외에도 제자들 양성과 재능기부 봉사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홍명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월이 주는 시간적 여유 덕분이었다. 다른 계절, 혹은 다른 날이었다면 전화통화 이후 일사천리로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운이 좋아 만난 그였기 때문일까. 그에게 듣는 지승공예 이야기는 재미 그 이상이었다. 특히 요강에 얽힌 이야기가 그러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이전에는 한 번도 가마 안에 있던 요강의 재질이 궁금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불편하고 쑥스러워 진짜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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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를 꼬아 작품을 만들다
 
홍 명인이 한지공예에 발을 들인 것은 30여 년 전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취미 삼아 문화센터에 다니다가 한지공예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제가 젊었을 때만 하더라도 문화센터 같은 곳이 많아서 이것저것 배울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꽃꽂이를 배웠었는데 한지공예의 아름다움에 반해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
 
한지공예의 아름다움과 그 경이로움에 매료되긴 했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취미에서 시작해를 업이 되어버린 한지공예의 길이었지만 그에게는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한지공예였어요. 그렇게 시작된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이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이지 않았나 싶어요.”
 
한지를 오리거나 찢어 붙이는 한지그림, 종이를 겹쳐서 두껍게 만든 종이인 합지를 재단해 생활용품을 만드는 지함공예, 나무로 골격을 짜거나 대나무, 고리 등으로 뼈대를 만들어 안팎으로 종이를 여러 겹 발라 만드는 지장공예, 닥종이를 잘게 찢어서 물에 불려 찹쌀풀과 섞어 반죽한 다음 찧어 이겨서 그릇모양의 틀에 조금씩 붙여가며 말리는 과정을 반복한 뒤 골격을 떼어 내고 옻칠하거나 그림 또는 색을 칠하는 지호공예 등 그의 손을 거쳐 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한지공예와 함께한 끝에 그는 한지공예의 백미라고 불리는 ‘지승공예’에 더 큰 열정을 쏟을 수 있게 됐다.
 
여타의 다른 공예도 그렇겠지만 한지를 하나하나 손으로 비벼 꼬아 만드는 지승공예는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했다. 공예품을 만들 만큼 기다란 한지 자체를 구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짧게 잘린 한지를 길게 잇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지를 손으로 꼬아 가는 끈처럼 만드는 것이 얼핏 보면 쉬워보일지 몰라도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에요. 한지를 두 손으로 단단히 말아 가는 끈처럼 만든 것을 홑줄이라고 해요. 그 홑줄 두 가닥을 꼬아 겹줄을 만들죠. 바로 이 겹줄을 씨줄로 삼고 홑줄을 날줄로 삼아 생활용품을 엮어내는 것이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작품 위에 옻칠을 하거나 찹쌀로 풀을 만들어 입히는 작업까지 해야 하니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지요.”
 
홍 명인의 말처럼 지승으로 만든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홑줄과 겹줄을 만들다 보면 손가락 끝이 아리고 시리는 것은 당연하고, 살이 터지고 다시 새살이 돋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은 다반사이다. 그렇게 씨실과 날실이 서로 교차되며 드나드는 일이 수없이 반복돼야 비로소 작품 하나가 탄생한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온전히 작품에만 몰두하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작품 하나하나에 쏟는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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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공예,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홍 명인의 지승공예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달빛 길어올리기(2010)〉에도 등장한다. 영화는 임진왜란 때 타버린〈조선왕조실록〉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 본을전통 한지로 복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위해 임 감독은 실제로 종이를 만드는 지장들을 찾아다녔으며, 영화를 통해
전통 한지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고자 했다. 바로 이 영화〈달빛 길어올리기〉에서 한지공예가로 분한 예지원(효경)이 작업하던 지승공예 작품의 실제 작업자가 홍 명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찾던 임 감독에게 홍 명인의 지승공예 작품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잘 맞아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지승공예 분야에서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그였기에 자연스레 임 감독의 눈에 들었을 것이다.
 
그의 실력은 수많은 수상경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홍 명인은 2005년 청주국제공예 비엔날레 입상에 이어 한지공예부문 ‘경기으뜸이’에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2006년 경기도여성상(예능부문)과 신미술대전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후 2011년 41회 대한민국 공예품대전 후원기관장상, 2013년 38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본상 그리고 2013년 G-공예페스티벌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작품 작업 외에 강연과 강의, 재능기부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이지만 작품을 만들고 각종 대회에 출품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다.
 
지승공예의 가치와 매력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자기개발을 위한 좋은 장(場)이 되기 때문이다.
 
“지승공예 말고도 한국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고 알릴 수 있는 분야가 참으로 많아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지승공예를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한국을 알릴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젠 제 운명이자 제가 끝까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요.”

홍 명인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것의 일환으로 다문화가정 주부를 대상으로 한지공예전통문화체험을 실시하고 있다.

“2009년 중원구청으로부터 다문화가정 주부를 대상으로 한지공예전통문화체험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이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2010년부터는 성남시의 후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어요. 다들 재미있어 하고, 한지공예를 배우면서 이안에서 서로 소통하고 대화하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해요. 일석이조죠.”
 
지승공예는 옛날 우리 선조들이 서책을 읽고 난 뒤, 오래된 책들을 그냥 버리지 않고 가늘게 찢어 그 종이들을 꼬아 생필품을 만든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주로 사대부 집안의 선비들이 다 배운 서책으로 요강이나 대야, 미투리(삼이나 노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 등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하니 그 검소함과 창의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것들이 시간이 흘러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됐다.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것들이다. 현재 실생활에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전통을 등한시 하거나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홍 명인 역시 전통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이 깨달아 유물을 복원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지는 우리 민족성처럼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고 깨끗하면서도 은은하며 정감이 넘쳐요. 이런 아름답고 매력적인 소재를 이용해 실생활에 필요한 기물을 만들어 사용하던 조상들의 지혜와 솜씨를 오늘날에 재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미적 감각이 뛰어났는지 작품만 봐도 짐작할 수 있거든요.”

2010년 홍 명인은 ‘전통 지승, 지함공예 복원전’을 개최하며 지승 자라병, 등잔대, 요강, 지승 차반 모음, 항아리 등 전통 유물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다. 많은 시간과 집중력을 요했던 작품들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어찌 보면 느리게 보일 수 있는 삶이지만 홍 명인은 지승공예가 주는 느림의 미학과 선조들이 준 삶의 철학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제가 아들만 둘이에요. 제 소원이 있다면 예비 며느리가 지승공예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전통을 이어갔으면 하는 거예요. 아들들은 관심 없어 하고, 누군가 제 뒤를 이어 지승공예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세상 가운데 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죠. 너무 큰 욕심일까요?”

소박할 수도 있는 이 바람이 너무도 간절하게 그리고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전통을 이어가려는 젊은이들이 그리많지 않은 현실 때문일 것이다. 허나 또한 희망을 갖는 것은 그 어딘가에 분명 우리의 전통을 이어갈 재목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홍연화 명인의 바람이 이뤄져 오랜 시간이 흐른 그 어느 날 지승공예로 만든 작품이 세상 가운데서 더욱더 빛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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